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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럼] 이상한 계산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현행 휴가제도를 유지한 채 주5일 근무제가 실시되면 일년의 반이 휴일이라는 대한상공회의소의 '주5일 근무제와 휴일 수의 국제비교조사' 가 보도된 날 같은 신문사에 25년을 몸 담고 있는 한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그간 가지 않아 밀린 휴가들만 다 찾아도 정년까지 일을 안해도 될 거야. "

딴은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도적으로 보장된 휴가라면 악착같이 활용하려 드는 나마저 쓰지 않고 지나간 휴가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엔 1995년부터 '법으로 정해진 휴가는 아니나 기업들이 노사간 단체협약이나 취업규칙을 통해 부여키로 한' 약정휴가로 6일간의 겨울휴가가 있지만 나는 아예 가지 못하거나 기껏해야 3일을 쉴 뿐이어서 온전히 휴가를 즐긴 것은 올해가 처음이었다.

그뿐인가. 요즘 "폐지하자" "안된다" 로 기업과 여성계가 소리를 높이고 있는 생리휴가만 해도 23년11개월의 근무 가운데 단 한번 쓴 것이 전부였으니 두 아이의 임신.출산기간을 제외해도 무려 2백69일(!)이나 허공에 날린 셈이다.

언론학자들로부터 "선진국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적으로 우리와 비슷한 국력을 가진 나라 가운데 일요일에 신문이 나오지 않는 나라는 우리나라뿐" 이라는 비난을 받는 신문업계이지만 그 일요일만 빼면 신문이 안나오는 날이 없어 1월 1일과 설날.추석연휴(그것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남들이 다 쉬는 법정 공휴일도 반납한 지 오래다.

이런 판국에 주5일 근무제가 되면 일년 3백65일 가운데 남자는 1백53일~1백63일을 쉬고, 여자는 1백65일~1백75일을 쉰다니 기자들의 처지가 새삼 불쌍해 보였다.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하면서 월차휴가와 생리휴가를 폐지해도 우리의 휴일수가 1백41일~1백51일로, 세계 최장의 휴일수를 자랑한다는 프랑스(1백45일).독일(1백40일)보다 많다니 이 얼마나 '환상적인 나라' 인가. 그런데 '상대적 박탈감' 을 느낀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월차휴가 12일에 연차휴가 10~20일이라고요? 저는 1년 가봐야 겨우 며칠 사용하는 정도고 동료들도 마찬가지인데 다 가는 회사도 있나보죠?" (회사원), "공공부문 근로자들은 5년이 지나야만 20일의 연가가 주어지지만 하계휴가 5~6일이 고작이고 분기휴가는 거의 이용하지 않아요. 공직자 가운데 20일을 다 쓰는 이는 1%도 못될 걸요. "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이런저런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봐도 일년에 확실하게 휴무를 보장받은 날이란 일요일과 법정공휴일, 그리고 여름휴가 며칠이 전부라고들 했다. 공휴일만 접어 생각한다면 기자들이나 다른 직종이나 불쌍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환상적인 대한민국' 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아니 과연 이런 이들이 있기나 한 것일까.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다는 신분이 불안정한 비정규직 종사자, 1년 미만의 근속으로 아예 연차휴가가 없는 이, 명절을 제외하고는 공휴일을 제대로 사용하기 어려운 중소기업 노동자 등을 감안하면 한국의 실제 휴가사용일수는 78.8일이라는 수치도 있다.

휴가일자만이 아니다. 현행보다 출산휴가 30일을 더 늘리는 것을 골자로 한 모성보호관련법안의 개정을 추진할 때도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내놓은 예상비용과 여성계의 비용이 크게 달라 한바탕 격렬한 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 제도가 적합한지 아닌지를 검토해보는 밑자료를 공론의 장에 내놓을 때는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현실은 모든 잣대를 자신에게 유리하게만 디미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래서는 결코 사회가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더욱 나쁜 것은 사회의 발전을 방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대방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사회의 근간을 뒤흔든다는 데 있다.

사실과 동떨어진 '꿈의 숫자' 발표로 모든 이들을 황당하게 만들고 여기저기 불협화음만 냈다는 것을 대한상의는 알고나 있을는지.

홍은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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