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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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3년 동안 절치부심하였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우선 자신의 영토에서 농민들을 확보하여 상비군을 편성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농민들은 농번기에는 논밭에 일하러 나가야 하고 전투는 주로 농한기에만 했던 것이었다. 이른바 병농분리(兵農分離)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오다는 농민이나 도시하층민 중에서 사람을 골라 민첩하게 행동하는 보병을 선발하였다. 이 보병을 아시가루(足輕)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이들이 경장(輕裝)으로 민첩하게 활동하여 정찰.방화.복병의 역할을 맡아왔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았으며 마침내는 가신단(家臣團)의 말단에 편입되어 3년 동안 조직적인 군사훈련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훗날 오다의 뒤를 이어 천하통일의 위업을 완성한 사람이 바로 이 미천한 아시가루 출신의 아들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였다는 것은 아이로니컬한 일일 것이다.

또한 오다는 무사들을 칼 대신 조총으로 무장하였다. 직접 조총의 탄환이 갑옷을 뚫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오다는 오직 조총만이 다케다의 무적 기마군단을 무찌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오다는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조총을 수백정 구입하여 자신의 무사단을 조총으로 무장시켰다. 그 당시 조총은 화승총(火繩銃)이라고 불렸는데 문자 그대로 탄환을 재고 심지에 불을 붙여서 발사하는 세 가지의 단계로 나누어져 있었다. 오다는 이 세 가지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조총의 치명적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삼단식(三段式) 사격전술을 구사하였다.

즉 선두 열은 발사하고 물러나고, 두 번째 열은 심지에 불을 붙이고, 마지막 열은 탄환을 재는 일을 동시에 반복함으로써 잠시의 공백도 없이 일제 사격하는 효과적인 공격전술을 창안해낸 것이었다.

훗날 오다의 이 독창적인 전법은 그대로 도요토미에게 이어져 임진왜란 때 조선의 군사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던 것이 바로 조총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천하쟁패를 다투는 나가시노의 전투는 오다와 도쿠가와 연합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던 다케다의 무적기마군단은 연합군의 조총사격에 의해서 거의 전멸해버린 것이었다.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賴)는 간신히 살아남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자신의 고향인 고후(甲府)로 도망쳐왔다. 그는 성안에 은거하면서 재기를 노렸다. 이때 고후로 도망쳐가는 가쓰요리의 군사를 오다는 끝까지 추적하여 궤멸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오다를 제지한 사람이 바로 도쿠가와였다.

"가쓰요리는 이제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닙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그는 반드시 자멸해버릴 것입니다. "

예부터 다케다의 영토는 후지(富士)산 일대의 산록. 가쓰요리가 일단 패하였다고 하지만 가쓰요리를 쫓아 산간내륙지방까지 쳐들어가는 것은 연합군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옛말에 이르기를 '건드리지 않은 신(神)은 탈이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자연 죽어버릴 송장을 공연히 건드려 화를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

여기서 도쿠가와가 한 말은 유명한 일본 속담에서 나온 말. '건드리지 않은 신에 탈이 없다라는 말은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라는 말로 도쿠가와의 철학을 알아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하다.

실제로 전국시대 때 세 영웅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로 새가 울지 않으면 오다는 '새를 죽여 버린다' 라고 했다던가. 도요토미는 새가 울지 않으면 새가 울게 하였고, 도쿠가와는 '새가 울지 않으면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 라고 했다던가.

어쨌든 오다는 도쿠가와의 충고를 받아들여 퇴각하는 다케다의 군사들을 더 이상 쫓지 아니하였다.

'새가 울지 않으면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 는 도쿠가와의 기다림은 적중하였다. 가쓰요리는 고후 성에서 7년간 버티면서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모든 것은 허사로 끝이 나고 말았다.

소설= 최인호

그림= 이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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