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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가상과 현실 사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가상현실 기술이 초래할 수 있는 우울한 미래상을 그린 첫번째 영화는 10년 전 나온 '론머 맨(lawnmower man)' 이다. 극중 주인공인 조브 스미스는 한 젊은 과학자의 집 정원을 관리하는 정신지체인이다.

그는 과학자가 개발한 가상현실 프로그램의 실험대상이 되면서 머리가 좋아진 대신 폭력 성향을 갖게 된다. 가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살인.강간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그는 네트워크 상에서 신(神)이 되려고까지 한다. 첨단과학 시대의 프랑켄슈타인 괴물이라고 불릴 만한 '사이버 조브' 가 탄생한 것이다.

***대인기피증.리셋 증후군

이 영화가 출시될 당시만 해도 사이버 조브는 첨단기술이 몰고 올 장래를 지나치게 암울하게 보는 비평가의 머리 속에나 존재하는 인간형으로 여겨졌다. 가상현실이라고 해 봤자 공학이나 물리학 연구실의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조잡한 수준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몇년 새 그 기술이 눈에 띄게 발전해 각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활용되면서 이런 인간 군상(群像)이 실제로 출현할지 모른다는 우려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사이버 조브는 현실과 가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가상현실 장애' 의 극단적인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컴퓨터 게임이나 인터넷에 너무 몰입한 탓에 가상과 현실 사이에 혼란을 느껴 정신과 클리닉이나 심리치료 상담소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대인 기피 증세를 보이거나 인내심이 없어지는 '리셋 증후군(reset syndrome)' 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컴퓨터가 이상을 일으켰을 때 리셋 버튼을 눌러 다시 실행 프로그램을 가동하듯 즉흥적으로 기존의 업무나 인간관계를 포기해 버린다는 것이다.

리셋 증후군에서 더 나아가 사이버 조브처럼 극단적인 폭력성을 드러내는 경우 역시 가끔씩 발생하고 있다. 컴퓨터게임에 중독된 10대가 사소한 이유로 가족을 살해하거나, 자살사이트를 통해 알게 된 사람을 돈을 받고 죽인 사례가 국내에서도 일어난 바 있다.

미국에서는 고교생이 인터넷 폭력 사이트에서 배운 방식대로 총기를 난사해 수십명이 죽기도 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오랫동안 사이버공간에 접속하면 뇌 기능 장애가 생길 수 있다는 섬뜩한 주장을 펴는 판이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가상현실이 인터넷이나 컴퓨터게임 등 일정한 분야에 머물지 않고 가상.환상문화로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면서 사람들의 현실 인식을 무디게 하고 있다.

영화계로 눈을 돌려보자. 현재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는 대부분의 개봉작은 3차원 디지털 애니메이션 영화다. 파이널 환타지, 슈렉, 캐츠 앤 독스, 쥬라기공원 3, 툼 레이더 등이 그것이다.

특히 '파이널 환타지' 는 인물의 입술 주름과 눈의 핏발, 피부의 질감까지 표현해 관객들을 가상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컴퓨터그래픽이 스크린에서 인간을 밀어낼지도 모를 일이다.

문학계에서는 『드래곤 라자』 등 가상과 현실을 오가는 팬터지 소설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얼마 전 서울대 등 몇몇 대학 도서관의 대출 목록에 팬터지 소설이 순위 1, 2위를 차지할 정도로 젊은층의 관심을 끌고 있다.

미술계에서는 정밀한 묘사로 가상을 현실로 느끼게 하는 극(極)사실주의 전시회인 '사실과 환영' 이 주목받은 바 있다.

***인터넷중독센터 설립 기대

소설 『개미』를 쓴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환상이 현실이고, 현실이 환상인 시대가 머지않아 올 것" 이라고 공언한다. 이미 우리는 그 시대의 길목에 와 있는지 모른다. 가상과 현실을 혼동하면서 이를 대인공격으로 표출하는 사이버 조브의 출현에 대비할 때가 된 것이다.

정부는 청소년들을 유해사이트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대책의 하나로 인터넷중독센터의 설립을 검토 중이다. 이런 센터에서 가상현실 장애에 대한 기초연구를 시작하는 것도 방법일 것 같다.

이규연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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