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정부의 착시 교정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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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독히 바라면 '헛것' 이 보인다는데 유식한 말로는 '착시' 라고 부른다. 채플린의 영화 '골드 러시' 의 한 장면처럼 굶주린 사람의 눈에는 상대가 통닭으로 비치기도 한다.

지난 20일 본지 1면 '중국이 한국보다 더 자본주의적' 이란 기사를 훑다가 나는 대뜸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진념 부총리의 말이라니 무엇인가 헛본 것이 틀림없고, 그래서 '내가 벌써…' 를 되뇌며 나이 탓만 거듭했다.

그런데 어느 조찬강연에서 실제로 그런 얘기를 했고, 더구나 분위기에 들뜬 돌출발언이 아니라 평소 벼르던 말을 털어놓았으리라는 평이어서 일단 나이 걱정은 덜게 됐다.

*** 임금 격차·매판 자본 시비

중국이 한국보다 더 자본주의적이란 부총리의 지적은 전후 맥락을 살피건대 중국보다 '덜 자본주의적' 인 한국을 겨냥한 것이었다. 더 자본주의적인 것과 덜 자본주의적인 것의 우열에 대한 가치판단은 일단 보류하기로 하자.

그놈의 '색깔' 이 스미면 도통 얘기를 망치니 말이다. 아무튼 더 자본주의적인 근거의 하나로 부총리는 기업 내부의 급여가 10배 이상 차이 나는 점을 앞세웠다.

그러나 그 정도의 격차는 한국기업에도 흔하므로 새삼스럽게 중국의 '통닭' 이 부러울 것이 없다. 그의 불평은 오히려 '전향한' 사회주의 국가 중국조차 이런 불평등을 견디는데, 자본주의 '순종의' 한국에서는 특유의 균등의식이 나라 경제의 덜미를 잡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언제 닥칠지 모르는 해고 불안에 떠는 근로자들과, 실질금리가 영(零)에 가까운데도 투자를 꺼리는 기업들에 조용히 물어보라. 우리 경제가 이 모양 이 꼴로 뒤처진 것이 과연 중국처럼 임금 격차가 심하지 않기 때문인지를.

다른 하나의 근거로 중국에는 외국자본 진출을 국부유출로 몰아붙이는 '매판자본' 논란이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매판(買辦)은 18세기 중국 주재 외국 영사관과 상사들이 부리던 현지 고용인으로 대개 외세의 앞잡이 노릇을 했었다.

그러니까 매판의 본토 중국에도 외자 시비가 없는데, 한국에서는 외환위기 직후 사그라지는 듯하던 국부유출 비판이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 부총리의 불만이다. 이번 '통닭' 은 매판인데, 이렇게 되면 꽤나 중증이다.

세계화 시대의 자본은 활동에 제약이 없으므로 굳이 매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혹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매판 정부' 일지 모른다. 동아시아를 초토로 만든 국제 투기자본이 중국을 굴복시키지 못한 이유를 폴 크루그먼은 위안(元)화의 비교환성에서 찾는다.

한바탕 휩쓸고 싶어도 자유로 바꿀 수가 없으니 바라만 보고 말았다는 말씀인데, 이것이 내 얘기라면 무식의 표본이라고 박장대소를 했으리라.

그러나 진실은 의외로 '허름한' 것이었고, 그 허름한 진실이 금융투기로부터 중국을 지켜준 안전장치가 되었다. 외자가 들어와 또 하나의 삼성전자와 포항제철을 세운다면 무엇이 걱정이랴□ 세우는 대신 집어삼키기에 매판 걱정이 첩첩한 것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이 30년 먼저 태어났다면 한국이 설 땅이 없었을 것" 이라는 자탄이나 "중국은 빛의 속도로 변하며 '세계의 공장' 으로 변신하는 중" 이란 부총리의 초조감을 나는 십분 이해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착시는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못하면 5~10년 뒤 우리 경제의 위상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소름이 끼친다" 고 토로했다. 개발독재 정권에서 문민정부를 거쳐 오늘 국민의 정부까지 온갖 요직을 두루 거친 그가 우리 경제의 장래에 소름이 끼친다면, 그의 정책을 믿고 따라가는 국민은 어쩌란 말인가? 부총리의 힘과 권한을 가지고도 기껏 개선타령이나 하고 앉았다면, 나라 경제는 대체 어찌되는 것인가? 다른 사람은 다 해도 그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 발목만 잡지 말라는 財界

부총리가 못한다면 누가 하겠는가? 통닭처럼 마음대로 구워지지 않는(?) 정치권의 행태가 그로서는 아주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대로 구워온(!) 재계도 그를 향해 "도와주지 않아도 좋다. 제발 발목만 잡지 말라" 고 한 맺힌 소리를 토해낸다. 중국에서 배울 것은 임금격차도 매판자본도 아니다. 세계화 강요의 살벌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궁리이고, 그것은 정부와 기업이 손잡고 짜내야 한다. 여기 시급한 것이 정부의 착시 교정이다.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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