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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고무호스를 꼬았다, 가구가 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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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가구 디자이너 이광호씨가 직접 손으로 꼬고 엮어 만든 소파에 앉아 쉬고 있다. 라면처럼 생긴 소파는 오직 손으로만 엮어서 만들었다.

깎고 붙이고 못박고…. 가구를 만드는 데는 대개 이런 말이 쓰인다. 그런데 이 남자, 꼬고 엮어 가구를 만든다. 디자이너 이광호(29)씨 얘기다. 전선이든 호스든 긴 재료만 있으면 짚새기 꼬듯 꼬아서 의자건 수납장이건 가구를 만들어낸다. 그는 순수 국내파다. 한데 그의 이름이 먼저 알려진 건 해외에서다. 2008년 4월 캐나다 몬트리올의 한 갤러리에서 초청 개인전시회를 시작으로 줄곧 외국 갤러리를 돌며 전시를 하고 있다. 그런 그가 16일부터 5월 31일까지 서울 청담동 서미갤러리에서 첫 국내 개인전을 연다고 했다.

글=이정봉 기자 ,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이광호씨의 작업실은 서울 신수동 4층 빌라의 반지하에 있었다. 그 계단에 들어서면 고무냄새가 희미하게 풍긴다. 100㎡(30평) 남짓한 작업실 곳곳엔 전선·고무호스 더미가 쌓여 있다. 고무호스를 꼬아 만든 소파와 의자만 없었다면 ‘잡화점’으로 착각할 뻔했다. 이 허름한 작업실에선 얼마 전까지 이달 중순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리는 가구 박람회에 출품할 조명 작품이 만들어졌다. 그가 전선으로 꼬아 만든 전등갓은 이미 외국에선 알아보는 이들이 꽤 된다. 단순히 ‘꼬고 엮어 만든’ 친근한 느낌이 세계에 통한 것이다.

그가 꼬아 만든 가구를 생각한 건 우연이었다. 대학 시절,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시골에 갔다. 거기서 그는 수숫대를 노끈으로 묶어 만든 빗자루, 손때가 묻은 창호문 등 할아버지가 만든 물건을 보았다. “그때 디자인은 특별한 게 아니라 일상 속에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아요.”

어머니의 뜨개질서 찾은 한국의 미

그는 일상에 눈을 돌렸다. 어머니가 뜨개질하는 모습을 보았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 그가 어릴 적부터 자신 있던 분야였다. 조명 디자인 수업 시간에 그는 전선을 꼬고 엮어 모양을 만들어봤다. 하나의 매듭이 다른 매듭 속으로 파고들고 선끼리 엮인 무늬가 아름다웠다. 졸업전시회의 주제도 이거였다. 졸업 후에도 같은 작업을 계속했다. 작품들을 여기저기 국내 전시회에도 출품해 봤다. 한데 반응이 없었다. 답답했다. 그러다 “외국 디자인 사이트에 직접 작품을 홍보해 보라”는 선배의 충고에, 곧바로 영국·이탈리아 등 유럽 디자인관련 온라인사이트 대여섯 군데에 e-메일을 보냈다.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디진(www.dezeen.com)이라는 영국 디자인사이트에서 연락이 왔다. “작품을 우리 사이트에 싣겠다”고 했다. 사이트에 게재된 지 이틀 만에 캐나다 몬트리올 커미세어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어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얼마 후 전시회가 열렸다. 그리고 ‘한국 전통 방식의 놀라운 디자인’이라는 찬사와 함께 외국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자는 요청이 줄을 이었다.

유명 브랜드·아트페어에서 잇따라 전시


전선으로 조명 설치작품을 만들던 데서 고무호스로 소파를 짜는 데로 나아갔다. 하루 여섯 시간, 한 달을 꼬박 꼬아야 소파가 완성된다. 속까지 가닥가닥 촘촘하게 얽느라 손톱이 눌려 뿌리 부분이 들릴 정도였다. 노력은 배신당하지 않는다. 지난해 명품 브랜드 ‘펜디(Fendi)’의 ‘크래프트 펑크(Craft Punk)’와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유명 아트페어 ‘디자인 마이애미’에 이를 전시했다. 아직 서른이 안 된 이 디자이너의 발랄하고 유쾌한 ‘꼰 가구’는 계속 진화하는 중이다.


국내 첫 개인전서 선보이는 꼬불꼬불 작품

이광호의 조명장치는 전선과 전구만으로 돼 있다. 그런데도 화려하다. 전선 자체가 장식 요소가 된다는 걸 그는 작품으로 보여준다. 서미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회엔 그의 출세작인 전선으로 꼰 조명을 비롯해 고무호스로 엮은 의자·소파 등 30여 점이 전시된다. 그의 작품들을 미리 둘러봤다.

성기게 짠 스웨터 모양의 조명 작품은 전선 한 줄로 이루어졌다. 그 전선 끝에 전구와 플러그가 달렸다. 애초의 전기 조명은 아마도 이랬을 거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구 위에 갓을 해서 씌우고, 각종 장식을 붙이며 조명장식으로 발전해왔을 터. 이광호는 애초의 전선과 전구의 날 재료만으로 장식미까지 살리는 재치를 보여준다.

그의 소파는 언뜻 보기에 라면을 쌓아놓은 것 같다. 고무호스로 고불고불 엮어놓은 것이 영락없는 라면이다. 1인용 소파엔 1.5~1.8㎞의 고무호스가 쓰인다고 했다. 300m 단위로 잘라 파는 호스를 끊긴 부분마다 묶어서 이어 만든다. 의자와 소파는 비어 있는 부분 없이 빼곡하게 호스로 꽉 들어차 있다. 앉아보면 고무 위에 있는 것 같다. 엮인 호스가 마치 스프링처럼 몸의 하중을 받쳐주기 때문에 앉거나 누워도 불편하지 않다. 가죽소파의 푹신함과 나무의자의 딱딱함, 그 중간 정도의 탄력이라고나 할까. 전선과 호스 모두 시중에 판매되는 제품이 아니라 따로 공장에 주문해 만든다. 엮거나 꼬고, 가구로 쓰기에 알맞게 부드러운 고무 부분이 많이 들어가 있다. 02-511-7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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