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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부활의 기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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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돌이켜 보면 4월은 나무와 함께 자라난 시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은 별로 대단하게 기억되는 것 같지 않지만 지난 시절 4월은 식목행사에 분주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작은 묘목들을 산과 들에 심던 고사리 손은 두툼해졌고 기억 또한 망각의 껍질을 뒤집어썼지만 그때 심어진 나무는 어찌 되었는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도로를 내느라 여기저기 뿌리째 뽑혀져 나뒹구는 나무를 보고 있으면 동심의 궁전이 마구 파헤쳐져 황폐함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입니다. 덕분에 별을 헤아릴 수 없게 된 도시는 별(?) 볼일 없는 인생들이 자리해야 할 것 같고, 동심이 파괴된 자리에는 현란한 말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는 느낌만이 듭니다.

일러스트=강일구

언제부터인가 뉴스나 신문지상에 이상 현상이라는 말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환경오염이라는 말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각종 자연현상에 ‘이상’이라는 말들을 심심치 않게 붙이고는 합니다. 어떻게 자연이 이상해질 수 있다는 것인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실상 이상해진 것은 우리 인간임에도 애매하게 자연에 그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자연을 파괴하고 화석연료를 마구잡이로 사용했으면서도 마치 자연이 이상해진 것처럼 말하는 것은 책임소재를 불분명하게 만들어 해결책조차 찾지 못하게 하려는 고도의 술수는 아닌지…. 사실 이런 말들의 오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의 언어는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기에 잘못된 언어는 잘못된 문화를 낳을 확률이 그만큼 높아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무지가 얼마나 말의 길을 잃어버리게 했는지 반성, 또 반성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오염이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어떻게 환경이 스스로 오염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 말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오염의 주범이라는 말과 별반 다르게 들리지 않습니다. 환경은 스스로를 정화하기는 해도 스스로 오염시키지는 않습니다. 결국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인간의 오염이 만들어 낸 결과일 뿐입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이처럼 잘못된 습관을 간직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 옛날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 카인과 아벨처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다른 이들에게 떠넘겨 왔으니 말입니다. 그 오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오늘도 교묘한 언어의 위장술을 빌려 그러고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환경오염”은 “인간 오염”이고 “환경오염의 수치”는 “인간의 오염 수치”라는 진실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말이 말 같을 때 마음이 움직이고 행동이 따라가는 법인데, 말이 말 같지 않으니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행동은 늘 굼벵이처럼 더딜 수밖에 없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4월은 부활절이 자리합니다. “주님은 부활의 약속을 책들 속에만 쓰신 것이 아니라 봄날의 잎사귀마다 쓰셨다”는 말처럼 부활의 기쁨이 단지 인간만의 기쁨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자연들의 기쁨이 되기를 간절하게 기도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인간을 대신해 모진 고난과 고통, 죽음을 겪으신 예수님처럼 이 땅의 자연은 아직도 사순절 -천주교에서 40일 동안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묵상하는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인간의 손을 빌려야 자연이 정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이 자리하는 오늘, 이 땅의 자연들은 또 얼마큼의 사순절을 보내야 부활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인지 안쓰러움과 죄스러움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자연은 하느님의 손길 위에 있어야 그 길을 잃지 않고 자연이 길을 잃지 않아야 인간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지 않게 깨닫기를 기도하게 되는 4월입니다. 어린 시절 북한산 너머로 지던 붉은 노을을 담았던 아이의 눈은 이제 잿빛 매연을 담고 철철이 마주하던 처연한 붉은 빛의 진달래 대신 기름때를 뒤집어 쓴, 빛 바랜 개나리를 마주할 뿐이지만 그래도 기억 저편의 아름다운 영상을 아이들의 두 눈에 남겨주고 싶음은 이 땅을 사랑하는 모든 이의 마음입니다. “어둠에 절망하기보다 작은 촛불 하나를 밝히는 것이 낫다”는 중국 속담처럼 이 땅의 자연에 잔인한 4월이 아닌 생동하는 4월이, 고통과 고난의 사순절이 아닌 부활의 4월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옛날처럼 작은 묘목 하나라도 심어보는 4월이었으면 합니다. 더불어 심어진 나무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하고 함께 자라나고 함께 살아가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기도하는 두 손 너머 위태롭게 지고 있는 잿빛 저녁 노을과 생살을 도려내듯 아파하는 이 땅의 산하에도 부활의 참기쁨이 함께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권철호 삼각지 성당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