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태국 신고배의 기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정해문 태국 대사는 지난해 말 태국 에너지부 장관이 한국형 원전의 아랍에미리트(UAE) 진출을 축하하자 “원전만 잘하는 게 아니다. 한국이 5000년 역사의 농업 전통이 있는 국가라는 것도 아시느냐. 신고배 한번 드셔 보시라”며 신고배를 소개했다고 한다. 이어 올 2월 설을 앞두고 태국의 지도층 인사 600여 명은 정 대사의 신고배 선물을 받았다. 정 대사는 “갓 들여온 신고배가 태국 시장에서 최고급 과일 이미지를 쌓은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입소문을 타고 판매량도 2008년 17t에서 지난해 48t으로 세 배가 뛰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동남아·대만·홍콩에서 한국 과일은 고급품으로 상당한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싱가포르에선 요즘 한국 멜론이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농수산물유통공사(aT)에 따르면 2008년 1t에 지나지 않았던 매출이 지난해 109t으로 치솟았다. 농업이 강한 대만에서도 한국 배가 해마다 2000만 달러어치씩 팔린다. 19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한 사과는 지난해 대만 시장을 두 배로 넓혔다. 홍콩의 수퍼에도 한국산 딸기가 매장 맨 앞자리를 차지한다. 수입업체에선 “맛과 품질·가격경쟁력이 최고”라고 입을 모은다. 해마다 매출이 3~4배씩 늘고 있으니까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도 아닌 것이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농산물 수입 개방화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바나나·키위 같은 수입 과일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서민들은 기념일에나 잠시 맛볼 수 있던 사치품에 속했다. 우리 과일은 이런 대접과는 거리가 멀었다.

1990년대 초 대학 시절 학교의 광장이나 거리에선 농산물 시장을 외국에 열면 우리 농산물은 다 죽는다는 구호가 넘쳤었다. 대량 생산하는 외국의 값싼 과일의 공세를 견뎌낼 수 없어 농가가 도산하고 우리 과일이 시장에서 사라진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우리 배·사과가 한류를 타고 동남아를 휩쓸 줄을 누가 알았을까. 약진하고 있는 대한민국 브랜드 덕도 있겠지만 핵심 비결은 품질이었다. 이영철 aT 홍콩 지사장은 “국내에 팔고 남으면 수출하던 기존의 틀을 바꿔 국내 농가들이 수출에 초점을 맞춘 고품질 과일을 생산하고 있다”고 전했다.

생존의 벼랑 끝에서 좌절하지 않고 치열하게 살길을 찾아낸 과일 농가들의 쾌거는 서막에 불과하다. 진짜 승부는 거대한 중국 시장에서 펼쳐야 한다. 농가와 연구기관·정부의 입체적인 삼각 협력을 통해 중국 시장을 누빌 우리 과일이 나오길 기대한다.

정용환 홍콩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