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욱 칼럼] '국제 교류' 안 할 셈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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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8년 전 런던에 처음 갔을 때 우선 대영박물관부터 찾아갔다. 학교에서 배우고 책에서만 보던 인류의 숱한 문화유산들을 눈앞에 대하면서 압도됐던 느낌이 지금도 새롭다.

구석구석을 다 살펴보진 못했으나 그 많은 세계의 문화유산들 가운데 한국 것이라고 눈에 띈 것은 전시실 밖 복도에 걸려 있던 탱화 한 점뿐이었다. 말할 수 없이 당혹스럽고 초라한 기분이었다.

***한국문화 알리기 활성화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1백20평 규모의 한국실이 설치돼 우리의 문화유산도 세계의 문화유산 속에서 정당한 자리매김을 받고 있다. 대영박물관뿐 아니라 미국의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LA 카운티 박물관, 파리의 기메박물관, 멕시코의 문화박물관 등 7개국의 유수한 박물관에 한국실이 설치되었거나 설치되고 있다. 이렇게 상황이 바뀐 데는 한국국제교류재단을 중심으로 한 우리측의 재정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미국의 하버드대학에는 한국연구소가 설립되고 한국문학교수직이 신설돼 데이비드 매캔씨가 교수를 맡고 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이 교수직기금 3백50만달러를 지원하고 하버드대학 측이 대응기금으로 4백50만달러를 조성한 결과다.

하버드대학뿐 아니라 예일대, 스탠퍼드대, 컬럼비아대, 시카고대, 런던대, 규슈대,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대 등 60여개 세계 유수 대학에 한국학과, 한국학연구소, 한국학 및 한국어 교수직이 생겨나고 있다. 대부분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자금 지원과 해당 대학의 대응 출연에 의해서다.

이밖에도 외국과의 다양한 학술.문화.인적 교류 지원을 통해 한국의 문화국가로서의 이미지를 높이고 지한(知韓)인맥 구축 활동을 벌여 온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지금 위기를 맞고 있다. 재단 활동의 돈줄이 막히게 됐기 때문이다.

1992년에 설립된 이래 국제교류재단의 활동 및 기금 조성 재원은 여권 신규 발행시 부담하는 1만5천원씩의 국제교류기여금이 거의 전부였다. 그동안 일부 정부 보조가 있긴 했지만 주로 이 기여금으로 재단의 활동비를 쓰고도 올해 말이면 약 1천7백억원의 국제교류기금이 조성될 전망이다.

바로 이 국제교류기여금을 정부.여당이 준조세 감축의 일환으로 폐지하겠다는 계획이다. 대신 기금이 2천억원이 되도록 정부가 예산으로 지원하고, 그 기금 이자로 사업을 벌이되 모자라면 예산으로 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2천억원의 기금 조성을 정부가 보장한다 하더라도 현재의 금리 6%도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에선 올해 수준의 재단 사업비(2백20억원)를 확보하려면 매년 1백억원 정도의 정부 보조가 추가로 필요하다. 그동안 정부의 기금 출연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는데 국채를 발행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국가 예산에서 매년 이 정도의 보조가 과연 가능하겠는가.

설혹 정부가 사업비 보조를 해 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외교적 문제를 야기한다. 미국 등 일부 선진국에서는 외국 정부의 자금 수수를 금지하고 있어 우리나라에 대한 이해와 이미지를 높이는 재단의 대 선진국 활동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점 때문에 주로 정부 보조에 의존하는 일본국제교류기금은 그 산하에 비정부 보조금으로 활동하는 일미센터를 별도로 구성, 운영하고 있다.

*** 교류 기여금 폐지 철회를

문제는 현재 국가 운영을 맡은 집권세력이 국제교류.협력활동에 대해 바른 인식을 갖고 있느냐다. 자국의 문화와 언어를 선전.보급하고 다양한 인적 교류로 국가 이미지와 이해를 높이는 일에 영국문화원은 우리 국제교류재단의 40배, 독일문화원은 13배, 일본국제교류기금은 11배의 예산을 쓰고 있다. 예산 규모로만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이로써 선진국들이 조직적인 국제교류활동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정부.여당은 준조세 폐지라는 명분에 붙잡혀 지난 10년간 간신히 쌓아 놓은 국제교류의 기반을 흔드는 일은 신중히 해야 한다. 여권을 낼 만한 사람이면 발급받을 때 한번 1만5천원 정도의 부담이 그렇게 부담스럽겠는가.

더구나 출국할 때마다 매번 1만원씩 내는 관광진흥납부금 등 부처별 일반부담금 수십개를 그대로 놔둔 채 국제교류기여금을 폐지하겠다는 것은 논리도, 형평성도 무시한 일이다.

지한인맥을 구축하고 국가 이미지를 높일 조직적 국제교류활동의 필요성을 인정한다면 국제교류기여금의 졸속 폐지 계획은 철회해야 마땅하다.

성병욱 본사고문 ·고려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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