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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유럽사정에 어두운 부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의 소도시 '포르 생루이 뒤론' 의 필립 케제르그 시장은 지난 14일 유럽연합(EU) 정상들과의 첫 만남을 앞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우리 마을은 1944년 8월 25일 당신의 아버지 같은 미국 해군 덕분에 (독일군으로부터)해방됐습니다. 그런 마을을 다시 파괴하지 마세요. "

이 서한은 가장 시급한 현안이 무엇인가에 대한 유럽과 미국의 시각차를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 도시는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해수면의 높이가 계속 상승해 침수위기를 겪고 있다. 당연히 이 도시 사람들은 언제 날아올지 모를 미사일보다는 매일같이 침투하는 바닷물을 물리치는 게 시급한 문제다.

하지만 부시는 이번 유럽 순방의 최대 현안이 미사일 방어(MD) 구상의 필요성을 유럽국가들에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 고 자평했다.

부시가 말하는 '진전' 이란 유럽국가 중 최소 5개국으로부터 MD 구상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같은 성적표는 부시 대통령의 유럽순방 이전보다 결코 나아진 게 아니다. 대부분 유럽국가의 경우 처음부터 그같은 '미래의 적' 보다는 당장 직면한 '오늘의 적' 에 관심이 많다.

부시는 유럽방문에 앞서 온실 가스의 배출 감축을 위한 교토의정서를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인 환상" 이라고 평가해 유럽의 분노를 샀다.

이번 방문에서 다소 용어를 순화하고 기후.환경 연구에 투자한다는 대안을 제시했지만 "지금은 분석이 아니라 실천이 필요한 때" 라는 유럽의 인식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의 방문지마다 '반미' '반(反)부시' 구호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미국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유럽의 눈에는 미국이야말로 "힘을 믿고 제멋대로 구는 불량국가" 로 비치는 것으로 보인다. EU시민들과 언론은 부시의 유럽순방을 별로 곱게 보지 않고 있다.

라데팡스에서 만난 한 대학생은 "부시가 이번 여행에서 얻은 교훈은 아마도 유럽에도 발달된 문명이 있음을 확인한 것일 뿐" 이라고 해외 사정에 어두운 부시를 꼬집었다.

파리 이훈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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