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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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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버드나무 한 그루가 나의 가슴속에 있다. 고향을 다녀온 후로 버드나무는 내 생각의 다락 같은 곳에 거처를 하고 있다. 손이 바쁘다가도 문득 버드나무가 생각난다. 무정한 대상이 이처럼 무언(無言)으로, 그러나 결을 갖고 나의 마음에 한 자리를 턱 차지하고 앉아 있기는 드문 일이다. 시골 고향에는 작은 못이 하나 있는데, 이번에 찾아갔을 때 못가에 앉아 있다 그 버드나무를 발견했다. 물가에 서 있는 버드나무는 막 움트고 있어 실눈을 뜨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 버드나무의 아래, 물가를 내려다 보았다. 버드나무가 다른 나무들에 비해 그처럼 일찍 봄을 피워올리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물에 기대어 온 덕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을 물과 버드나무 사이의 대화라 부를 수 있을까.

나의 시골집은 요즘 헐리고 있다. 1979년에 지은 집. 애당초 너무 허술하게 지은 탓에 근년에는 지붕을 이고 앉아 있으려니 겁이 더럭 나서 더는 미루지 않고 집을 헐기로 했다. 다락에서 광주리와 한약을 달이는 데 쓰는 그릇, 아리랑 성냥갑, 사기 호롱, 브라운관 앞쪽에 미닫이문이 있는 텔레비전 등이 쏟아져 나왔다. 집을 헐고 있는 인부들 사이에 끼여 나는 내가 아홉 살 때부터 줄곧 살아온 집의 안쪽을 살펴보았다. 텅 빈 방을 보는 것은 야릇한 느낌을 주었다. 벽면엔 검은 곰팡이가 가득했다. 장롱 같은 것을 들어내고 천장을 허문 방은 가재도구가 꽉 차 있을 때보다 비좁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나는 내가 이 집에 오래 기대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나들과 서로의 몸 쪽으로 이불을 끌어당기며 싸우던 그때 그 마음으로도 돌아갔다. 그러면서 집에 대한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한 차례 지나갔다. 들일을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를 어두워지는 마당에 서서 기다리는 아이가 떠올랐고, 늦은 저녁 불을 때는 부엌에서 국수를 삶던 어머니의 불그스름한 얼굴이 떠올랐다. 숙제를 하느라 배를 대고 엎드린 동생이 왱왱거리며 글 읽는 소리, 큰일이 난 듯한 표정으로 끙끙 앓아누운 나를 바라보던 가족들의 오골쪼골한 근심들, 조리로 쌀 씻는 소리, 밥상에 가지런하게 놓인 수저와 그릇들, 갓 따온 과일과 가벼운 농담들, 돈과 그로 인한 숱한 말싸움들… 집이 헐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내가 집에 대해 속정이 깊게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흩어진 하나하나의 쌀알들을 주워담는 듯한 기분이었다.

영화 ‘아멜리에’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삶의 쾌락은 작고 무해한 감각적 즐거움으로 채워진 상자 같은 것이다.” 영화는 파이 껍질을 숟가락으로 깨뜨리는 순간의 쾌감과 강물의 수면에 물수제비를 뜨는 때의 작은 흥분, 곡식 자루에 손을 집어넣어 알갱이가 손가락 틈새를 빠져나가는 촉감 이런 것이 작고 무해한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물가 버드나무를 바라보면서, 또 헐리는 시골집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가 기대어 온 것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사실 우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기자기하고 사소한 이야기들이 전부일지 모른다. 그것을 무용(無用)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한다면 대화를 거절해 온 사람의 얘기가 될 성싶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