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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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4. 속세의 관심

성철 스님은 1981년 1월 조계종의 최고 지도자인 종정에 추대되고서도 산문 밖 출입을 전혀 하지 않았다. "종정이 되셨으면 서울에도 나오고 여러 법회에도 참여해 법을 베푸는 것이 도리인데, 예전과 다름없이 산중에만 계시기를 고집하니 너무하시다" 는 불만이 일었지만 성철 스님은 누가 뭐래도 한마디로 일축했다.

"종정이라카는 고깔모자를 덮어썼다마는, 내 사는 거 하고는 아무 관계 없다. "

그래서 다른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들으면 내가 종정의 조문사절로 다니곤 했다. 스님이 써 주신 조사(弔辭)를 해당 본사나 사찰에 갖다 주고, 종정스님께서 오지 못한 데 대한 사과를 드리는 것이 나의 주된 임무였다. 그러다 다비식에 참석하게 되면 얼굴 익은 어른스님들은 "큰스님 모시고 있으니 나중에 잘못되지 않도록 이런 일들을 잘 봐 두어라" 는 당부의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나름대로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막상 일을 당하고 보니 어디서부터 무얼 어찌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다행히 해인사 스님들은 종정을 지낸 고암 큰스님, 총무원장을 지낸 자운 큰스님의 다비를 치른 경험이 있었다. 스님들이 문상객 맞이와 영결식.다비식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해 갔다. 장례는 7일장으로 정했다.

워낙 세간에 얼굴을 안 보인 종정스님이라서 마지막 가시는 길을 보고 싶어 하는 문상객이 그렇게 많았던 듯하다. 그중에서도 의외의 손님은 기자들이었다. 종합일간지나 방송사 기자들이 오리라곤 생각하지 않아 아무 준비도 안했다. 그런데 큰스님이 열반한 날 오후부터 추모기사들이 지면을 덮기 시작했고, 그날 밤과 다음날 새벽 사이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절집에서 정례브리핑이란 제도가 생긴 것도 전무후무할 것이다. 아침 브리핑 시간이 되면 "오늘 어떤 저명인사가 문상 온다고 했습니까?" 라는 것이 항상 첫 질문이었다. 미리 알리고 오는 사람이 드물어 매번 대답이 궁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서전(書殿)에서는 송월 스님을 비롯해 붓글씨 잘 쓰는 여러 스님들이 '만장(輓章)글' 을 열심히 썼다. 주로 경전 구절이나 선사 어록이었다. 청하는 글이 따로 있으면 부탁대로 써주기도 하고, 만장마다 청한 사람의 이름을 적어주기도 했다.

전국에서 비구.비구니 스님들이 찾아와 지극히 애도하고, 가신 스님을 위해 누구나 정성을 다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전해왔다. 스님들 사이에 "큰스님 깨달음의 경지에서야 모든 것이 필요 없지만, 산중대중의 허허로운 마음을 달랠 길 없으니 대중의 정성을 모아 금강경을 독송하자" 는 뜻이 모아졌다. 오후 9시부터 스님들이 빈소인 궁현당에 모여 '금강경' 을 독송했다. 조문 온 신도들까지 한마음으로 참여, 상좌들에게 또 다른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마침내 출상 당일의 날이 밝았다. 아침이 되자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스님의 마지막 길을 애도하는 신도들이 새벽부터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전날 저녁 산중회의(스님들의 회의)에서 "점심 도시락을 1만개 정도만 준비하면 될 것" 이라고 추정, 카스텔라와 음료 등을 1만명 분만 준비했는데 아침해가 밝기도 전에 1만명을 넘는 인파가 산사를 가득 메웠다.

11월 10일 오전 11시. 해인사 구광루 앞마당에서 영결식이 시작됐다. 다섯번 치는 범종의 메아리가 어찌나 길게 가슴을 저미는지…, 솟아오르는 슬픔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안경 너머 로 오열하는 스님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김종필 민자당 대표, 이기택 민주당 대표, 이민섭 문화체육부장관, 박관용 대통령비서실장, 권익현 정각회 회장, 박찬종 신정당 대표 등 정계의 거물들이 참석한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길고도 짧고, 짧고도 긴' 영결식은 두시간만에 끝났다. 큰스님이 59년간 지켜온 산문을 떠날 시간이다.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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