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아 “올림픽 뒤 준비할 수 있을지 두려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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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호 08면

김연아가 26일(한국시간) 드레스 리허설에서 ‘본드걸’ 연기를 점검하고 있다.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지만 27일 쇼트프로그램에서 부진한 연기를 했다. [토리노=연합뉴스]

‘본드걸’ 김연아(20)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지쳤기 때문이다. 쉼 없이 달려온 한 시즌. 밴쿠버에서 본드걸의 미션은 끝났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새로운 미션이 그녀를 기다렸다. 휴식조차 없이 대륙을 건너야 했다. 팬들은 밴쿠버에서 본 완벽한 본드걸을 기다렸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웠다.

토리노 세계선수권, 충격의 ‘60점 성적표’

김연아는 27일(한국시간) 이탈리아 토리노 팔라벨라 빙상장에서 열린 2010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피겨스케이팅선수권대회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 출전했다. 성적은 시니어 무대 데뷔 이후 가장 낮은 60.30점, 순위는 7위였다. 1위 미라이 나가수(미국·70.40점)에게 10.10점이나 뒤졌다.

외신은 일제히 충격을 표현했다. AP통신은 “김연아가 부서졌다(Kim Yu-na crumbled)”는 표현을 썼다. 나가수의 성적보다 김연아의 실수를 먼저 보도했다. AFP는 “김연아는 제임스 본드 프로그램에서의 실수로 비싼 값을 치렀다”고 표현하면서 김연아의 인터뷰 내용을 자세히 전했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예상하지 못했던 여왕의 실패였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김연아가 “올림픽 뒤 준비할 수 있을까 불안했다. 이곳에서 싸우는 게 무서웠다”고 흔들리고 있는 심정을 말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아사다 마오가 프리에서 이길 기회가 남았다”며 기대를 나타내기도 했다.

세계가 놀라는 것이 놀라운 일은 사실 아니다. 충분히 예상도 가능했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지난 3년간 김연아의 목표는 오로지 2010 밴쿠버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목표를 이룬 김연아에게는 후유증처럼 허탈감이 찾아왔다. 김연아는 경기 직전 인터뷰에서 “그간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 불안했다”고 털어놨다. 김연아는 마치 수능을 끝난 학생 같았다. “피겨 스케이팅 훈련은 고행과 같다. 올림픽도 끝났는데 먹을 것 자제해야 하고, 훈련해야 하고, 나 자신을 이겨내야 하는데…”라며 푸념할 만하다.

인생의 목표를 달성한 지 딱 한 달 만에 나선 대회에서 동기 부여란 힘든 일이다. 세계선수권대회는 올림픽에 비하면 작은 대회다. 김연아의 투혼에 불을 지를 만한 대회가 아니다. 새 목표로 삼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김연아는 토리노 현지 훈련에서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자주 보였다. 훈련할 때 다른 선수들과의 기싸움 때문에라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김연아가 자주 짜증을 냈다. 쇼트 프로그램이 열리기 하루 전에는 훈련 도중 엉덩방아를 찧은 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공식 훈련에서 평정심을 잃는 일이 거의 없는 김연아로서는 의외의 모습이었다.

쇼트 프로그램 연기 내용은 김연아가 얼마나 지쳐 있는지를 보여줬다. 점프 실수는 흔한 일이지만, 스핀과 스파이럴에서도 실수를 했다. 트리플 플립 점프에서 착지할 때 휘청거렸고, 레이백 스핀은 제대로 돌지 못해 0점 처리됐다. 김연아는 원인과 과정, 결과를 잘 알고 있었다.

김연아는 “스핀 연기를 하면서 너무 힘이 들어간 것을 느끼면서 당황했다.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 했는데 어이없는 실수를 해 버렸다”고 아쉬워했다. “아픈 데는 없었다. 다만 다리가 흔들렸던 것 같다. 특히 왼발을 짚을 때 흔들렸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훈련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빙상 관계자에 따르면 올림픽 후 김연아가 세계선수권대회 출전을 완전히 결심한 건 불과 일주일 전이라고 한다. 김연아는 “대회를 앞두고 제대로 훈련한 것은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지난주까지도 스케이트를 타기 싫어 빈둥거렸다. 내가 가진 게 있었기에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도 말했다. 특히 “올림픽이 끝나고 또 경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고 솔직히 말했다.

몸 컨디션도 처져 있었다. 올림픽에 맞춰 컨디션을 조절해 온 김연아가 1개월 만에 컨디션을 다시 끌어올리는 건 무리다. 2~3년간 신체 사이클을 올림픽에만 맞춰왔다. 한 달 만에 세계선수권대회를 위해 몸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22일 현지에 도착한 김연아는 23일 훈련을 하루 쉬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컨디션이 매우 좋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김연아는 챔피언이다. “쇼트 프로그램은 잊겠다”며 “다른 대회에서도 실수한 경험이 많기 때문에 이번에도 잘 이겨낼 것”이라는 날 선 각오를 드러냈다. 어차피 스스로 결정해 출전한 대회였다. 그는 “오늘 일은 잊겠다. 내일도 시간은 많이 있다”고 분위기를 바꾸며 각오를 다졌다.

사실 김연아에게 더 중요한 문제는 앞으로의 일이다.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이번 대회가 끝나면 피겨스케이팅 시즌은 완전히 막을 내린다. 선택은 두 가지다. 먼저, 국제 대회에 참가하면서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에 또 한 번 도전할 수 있다. 은퇴 후 프로로 전향할 수도 있다.

김연아의 한 측근은 “본인조차 미래를 두고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태다”고 귀띔했다. 김연아는 2일 캐나다 토론토로 떠나면서 “연예계로 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김연아가 은퇴를 선택한다면 고려대로 돌아가 공부하면서 아이스쇼를 병행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브라이언 오서 코치와는 헤어지되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때 만나 일할 수 있다.

2014년 소치 올림픽에 도전한다 하더라도 곧바로 훈련에 돌입하지는 않을 것 같다. 김연아는 올림픽 전 인터뷰에서 “올림픽이 끝나면 그간 못 했던 것들을 다 경험해보고 싶다. 가고 싶은 곳도 가보고, 체중 조절 때문에 못 먹었던 음식도 실컷 먹고 싶다”고 말했다. 소치 올림픽까지는 4년이나 남았다. 그동안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충분한 휴식이 필요할 것은 분명하다.

김연아는 이번 대회가 끝나면 31일 귀국한다. 김연아는 매 시즌 마지막 대회인 세계선수권대회가 끝나면 5월 중순까지 한국에 머물렀다. 올림픽 전부터 미뤄왔던 광고 촬영이 기다린다. 올림픽 직후부터 김연아에게는 각종 광고 계약 의뢰가 쏟아졌다. 하지만 김연아 측은 이미 계약한 업체와의 광고 계약 외에 새로운 광고는 하지 않을 예정이다.

4월 14일부터 사흘 동안 아이스쇼 ‘페스타 온 아이스’에서 김연아를 볼 수 있다. 올림픽 시즌 동안 김연아는 국내 무대에 선 적이 한번도 없다. 그를 올림픽 퀸으로 만든 ‘007 메들리’와 ‘피아노 협주곡 바장조’ 연기를 국내 팬 앞에서 처음 선보이게 된다. 프로든 아마추어든 김연아가 좋은 스케이팅을 계속하고자 한다면, 해법은 이미 나와 있다.

김연아와 오서 코치는 올림픽이 끝난 뒤로 계속 ‘즐기는 스케이팅’을 강조해 왔다. 정확한 진단이다. 김연아의 지난 4년은 전쟁과도 같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주변은 돌아보지도 않고 점수와 순위, 정확하게 말하자면 올림픽 금메달을 향해 달렸다. 이제 그녀에게 금메달은 더 이상 새삼스러운 즐거움이 아닐 것이다. 스케이트 자체가 즐겁지 않다면, 팬들은 밴쿠버의 그 완벽한 본드걸을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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