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의료의 국제 경쟁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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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달 전께 캐나다에 사는 동포 청년이 기자를 찾아왔다. 자신이 설립한 회사의 홍보를 위한 방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사업내용이 기발했다. 한국 환자를 외국 의료기관에 소개해 저렴한 가격으로 치료를 해주겠다는 것이다.

기자가 1998년 미국 동부의 존스홉킨스, 마운트 사이나이 등 내로라하는 병원을 방문했을 때 놀란 것은 한국 환자의 통역을 맡을 직원을 상주시킨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공항까지 한국 환자를 영접(?)하는 병원도 있었다.

그렇다면 국내 환자를 겨냥한 이러한 사업은 수익을 낼 수 있을까. 지난해 한국 갤럽이 서울 거주 40평대 이상의 가정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를 보면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다.

조사대상 가정의 36%는 국내 의사의 진료에 불만을 표시했고, 77%는 진단시 오진 가능성에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또 미국 의료기관의 진찰을 받겠다는 사람은 81%, 치료를 받겠다는 사람도 68%나 됐다. 추산이긴 하지만 1년에 국내환자 약 1만명이 해외로 빠져나가 1조여원의 의료비가 국외로 유출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 의료기관에서 한국환자가 '봉' 이 된 지는 이미 오래다.

우리나라 의료법은 외국의 의료자본이 들어올 수 없는 조개 같은 단단한 구조로 돼있다고 한다. 병원의 영리법인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과 국내 의사면허를 가져야만 개원을 할 수 있는 조건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의료관계자들이 의료시장 개방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도 이러한 의료법이 보호막이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자본이 반드시 병원 형태로 들어올까. 기자가 취재한 바로는 캐나다 동포 청년 외에도 현재 최소 세 곳에서 국내 환자를 상대로 의료상품을 팔거나 준비 중이다.

이 중에는 미국 하버드의대 부속 MGH병원과 존스홉킨스 등 유명병원들이 출자한 다국적 회사도 있고, 암치료에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MD앤더슨 병원에 환자를 보내거나 그 곳의 암 검진 프로그램을 상품화한 곳도 있다.

지난해 일본에서 발간돼 화제를 일으켰던 '병원 침몰' 이란 책은 의료구조가 비슷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는 서문에서 '일본에 의료 빅뱅이라는 큰 파도가 밀려들고 있지만 의료관계자들은 아직도 단잠에 빠져있다' 고 개탄한다. 의료 빅뱅이란 외국의 의료자본을 뜻한다. 저자는 개척정신으로 무장한 미국의 의료경영 컨설턴트 1천5백여명이 일본에서 다양한 의료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전한다. 일본의 의료비가 30조엔에 이르니 군침을 흘릴 만도 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의료상품은 냉혹한 서비스시장에서 경쟁하며 살아남은 것들이다. 따라서 환자 중심의 의료, 뛰어난 효과의 의료기술,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강점을 내세운다.

순수한 산업차원의 시각에서 우리 의료의 국제 경쟁력은 몇점쯤 될까. 소비자를 외면한 공급자 중심의 의료는 환자의 변화와 욕구를 반영하지 못한 채 빈사상태가 되고 있고, 의료제도 역시 병원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달 말께 의료보험재정 안정을 위한 정부대책이 발표된다고 한다. 어떤 묘방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의료의 국제 경쟁력을 키우는 방안도 함께 강구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종관 정보과학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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