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 휘날리며

중앙일보

입력

‘인생은 70부터’를 외치며 활기차게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어르신들, 그들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새로운 일을 하며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3명의 어르신들에게 그 비결을 들어봤다.


김연하(67·덕양구 화정동)씨는 며칠 전 첫 월급을 받았다.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아온 김씨는 최근 ‘자연다믄 비누’작업장(덕양구 도내동)을 일터로 삼았다. “올리브는 뛰어난 보습 효과가, 어성초는 해독 작용이,귤껍질은 피부 미용에 좋고, 또 .” 평소 자연에 관심이 많았던 김씨는 한 달만에 천연비누 전문가가 됐다. 남편 권일성(67·덕양구 화정동)씨가 그런 김씨를 흐뭇하게 바라본다. 40여 년을 같이 산 부부가 함께 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권씨는 “다들 잘해주는데 아내만 절 구박해요”라며 함께 일하다보니 서로를 더욱 잘 알게 됐다고 말했다.

천연비누 제작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베이스를 자르고 천연재료와 함께 녹이고 몰드에 붓고 굳어질 때까지 기다린다. 굳은 비누를 랩으로 감싸 고정한 뒤 종이상자에 담아 포장하는 일까지 모두 수작업으로 진행된다. 힘을 필요로 하는 베이스 자르기는 작업장의 청일점인 남편 권씨가,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비누 만들기는 부인 김씨가 맡는다.

‘자연다믄 비누’는 지난해 고양시니어클럽이 노인일자리 창출을 목적으로 시작한 사업이다. 올 초, 만 60세 이상의 어르신을 대상으로 2기생을 모집한 결과 16명 모집에 80명이 몰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문의=031-904-2611~2


배선이(68·일산동구 풍동)씨는 2년차 바리스타다. 길을 걷다 커피전문점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들어가 맛을 본다. 우유가 끓는 소리만 들어도 상태를 가늠할 수 있다. 손님의 주문에 맞춰 커피를 내는 솜씨가 베테랑 바리스타 못지 않다.

물론 처음부터 완벽했던 것은 아니었다. 3개월간 교육을 받는 동안 생소한 메뉴와 복잡한 레시피를 외우느라 고생했다. 배씨는 “요즘도 가끔 주문이 헷갈린다”며 웃는다. 한 달 평균 50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는데 이는 대부분 용돈과 불우이웃 돕기, 탁구·스포츠댄스 레슨비등으로 쓰인다. 처음에는 몸이 상할 것을 염려해 반대하던 가족들은 생기 넘치는 배씨의 모습에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복지관 직원과 어르신들이 주로 찾던 개점 초기와는 달리 요즘은 동네 주민을 비롯해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외지 손님들도 늘었다. 배씨가 만드는 에스프레소를 마시기 위해 1시간씩 차를 타고 오는 단골손님도 있다고 한다. 배씨가 근무하는 ‘아지오’는 덕양노인종합복지관이 지난해 6월 시작한 실버카페로 현재 주엽역과 정발산역에 각각 2·3호점이 영업 중이다.

▶문의= 031-969-7781~3


일흔을 코앞에 둔 장삼례(69·일산서구 주엽동)씨는 전통찻집 ‘다향당’의 막내다. 오전 8시 가장 먼저 찻집에 도착해 하루를 준비한다. “직접 씻어서 삶고 걸러 달이는 대추차는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다”는 장씨의 말처럼 이곳 대추차는 진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매주 월·수·금요일은 다향당에서, 남은 3일은 복지관 식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누구보다 바쁘게 살고 있다. 장씨는 “언니들과 일하며 웃는 일이 많아져서 그런지 예전보다 건강해졌다”며 “집에서 TV만 보지말고 나와서 봉사활동이든 일이든 뭐든지 하라”고 조언했다. 월급을 모으는 재미도 쏠쏠하다. 얼마 전에는 중학생이 된 손녀에게 교복을 선물했다. 열심히 공부하면 대학등록금도 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다향당’은 일산노인종합복지관이 지난해 5월 노인일자리사업을 목적으로 복지관 지하1층에 오픈했다. 운영 수익금의 일부는 다향당에서 일하는 어르신들에게 되돌려준다.

▶문의=031-919-8677


[사진설명]45년을 부부로 살아왔지만 함께 일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는 권일성(왼쪽)·김연하씨. 이들은 “천연비누를 만들며 새로운 행복을 알았다”고 말한다.

< 송정 기자 asitwere@joongang.co.kr / 사진=최명헌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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