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수출만이 살 길' 언제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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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가 수입을 조심하면 수출은 스스로 조심할 것이다. " 족보도 없이 전해오는 경제학의 속언인데, 지금 우리 사정이 어쩐지 이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본디의 뜻이야 수입을 줄이면 수출도 준다는 경고겠지만, 수출이 줄어서 수입을 줄이는 경우도 문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하다. 이것은 물론 수출이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을 때의 얘기일 텐데, 지금은 사정이 뒤바뀌어 행여나 수입에 '무슨 짓' 을 했다가는 큰일나는 시대다.

*** 환율인상 편법도 안통해

지난 4월의 수출은 1백23억달러로서 지난해 동기에 비해 9.3%가 줄었다. 수입은 1백12억달러로 16.0%가 줄어서, 무역수지는 11억달러의 흑자를 나타냈다. 감소 폭으로 따지면 수출은 26개월래 최고이고, 수입은 29개월 만의 신기록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한파 속에서도 '동사' 를 면해주고, 달러 빈혈로 골골할 때도 부도를 막아준 것이 수출인데, 그 수출 전선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니 가뜩이나 어려운 나라 경제에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다.

더구나 이것이 4월 한달 만의 현상이 아니고 당분간 그 추세가 이어질 전망이어서 한층 불안이 깊어지는데, 단적으로 올 들어 4월까지 수출은 지난해 동기에 비해 0.6% 줄어든 반면 수입은 5.6%나 떨어졌다. 수출이 줄어서 수입을 줄게 하고, 그래서 다시 수출이 줄어드는 '축소 순환' 의 소용돌이에 빠진 것이다.

수출을 늘리는 고전적인 방법으로는 우선 남보다 싸게 파는 '가격 경쟁력' 이 있다. 개발의 견인차 노릇을 해온 한국 수출의 저력은 주로 값싼 노동력과임금 덕분이었고, 그래서 개발 독재에의 향수가 사회 일각에 없지 않지만, 기백달러 소득 시대의 그런 미련은 이제 버려야 한다. 다음은 비싸더라도 좋은 물건으로 버티는 '품질 경쟁력' 이 있다.

높은 부가가치 상품의 개발은 우리 수출의 염원이고, 더러 세계에 이름이 알려진 국산 제품도 있으나, 품질로 세계 시장을 다투기에는 여전히 힘에 부치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실물 차원에서의 경쟁력이 부진할 때, 국내 거래와 달리 국제 무역에는 화폐를 통한 경쟁력 향상의 수단이 있다. 자국 화폐의 평가 절하, 즉 환율 인상의 편법이 그것이다.

그런데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온 이것마저 지금은 말을 듣지 않는다. 중앙은행이 시장 개입 엄포를 놓을 만큼 환율이 오르는데도, 수출에 미치는 약발이 시원찮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요 교역 상대국을 비롯한 세계 경기가 내리막이고, 정보기술(IT) 제품 등 우리의 주력 품목이 세계적으로 공급 과잉이어서 한국 수출이 고전을 면치 못한다니 정말 이렇게 갑갑할 수가 없다.

올 1분기의 미국 경제가 2%대의 성장률로 예상외로 분전했지만, 일부 언론은 성장 불황(growth recession)이란 유식한 말로 그 진행 여부에 판단을 보류하는 형편이다. 일본 역시 미국과의 공모(?) 아래 엔저(円低)의 혜택을 마냥 즐기는 판이어서 우리의 환율 상승 효과가 줄줄이 새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 경기의 호전이 국내의 수출 애로를 풀어줄 때까지 무턱대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더라도 품질 경쟁력을 향상시키고, 틈새 시장을 개발하고, 수출 품목을 다양화하라는 따위의 '전천후 모범 답안' 을 거듭 아뢰야만 하는가?

*** 특별대책 남발은 부작용

펄쩍 뛰는 사람이 적지 않겠지만, 이제 '수출만이 살길' 의 주술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수출로 벌어들이는 달러의 중요성과, 수출 산업이 미치는 고용 효과를 난들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수출도 가계 소비.기업 투자.정부 지출과 함께 사회 총수요의 하나를 구성할 뿐이라면 해외 수요라고 해서 과도한 특혜를 베풀 이유가 없다.

오해가 없도록 다시 강조하거니와 우리 경제에 점하는 수출의 기여를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수출만이 살길이란 강박 관념으로 남발해온 특별 대책, 특단의 조처는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온갖 특혜 부작용에서 보듯이, 결과는 언제나 특별 대우보다 '보통 대우' 가 낫지 않던가□ 일례로 환율 상승에 의한 수입 인플레이션도 한몫 거들어 당장 5%대의 물가 위협이 우리 생계를 압박하고 있다.

그리고 수출이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수입도 조심하지 않는 법인지, 4월 중 자본재와 원자재 수입은 각각 23.4%와 20.1%가 줄었는데, 고가의 사치품을 포함한 소비재는 10.1%나 늘어났다. 자, 이제 수출도 수출로만 보통으로 대우하자.

정운영 <논설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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