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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리더는 왕성하게 독서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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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호 06면

16일 중앙SUNDAY 창간 3주년을 맞아 역사학자 이덕일 선생의 인문학 강연이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130명이 넘는 독자가 참석했다. 신동연 기자

“태종과 정조, 유성룡은 왕성한 독서를 통해 지적 통찰을 실천하고 부단한 자기 혁신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동시에 미래지향적이었습니다. 정조가 남긴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이 우리 왕가의 법도다’. 아주 멋진 말이죠. 세 사람의 공통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봅니다.”

이덕일 조찬 강연:조선 왕에게서 배우는 CEO의 고독과 결단

중앙SUNDAY 창간 3주년을 기념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에게 듣는 인문학 조찬 강연이 1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렸다. 이 소장은 매주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32면)를 연재하고 있다. 이날 강연 주제는 ‘조선 왕에게서 배우는 CEO의 고독과 결단’이었다. 법치국가의 토대를 마련한 태종과 개혁 군주였던 정조를 통해 성공한 국왕의 리더십을, 서애 유성룡을 통해 참모의 역할을 얘기했다.

강연에는 김상준 사법연수원 수석교수, 김종훈 한미파슨스 회장,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마승철 ㈜오크라인 대표, 서경주 MBC 라디오본부장,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 이종걸 민주당 의원, 임대기 삼성 부사장, 최영균 ㈜서우 회장, 황상민 연세대 교수(가나다 순) 등 중앙SUNDAY 독자 130여 명과 박보균 중앙일보 편집인이 참석했다. 강연이 끝난 후 최태형 변호사는 “최근의 세종시 논란을 정조가 건설한 수원 화성과 연관해 설명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세종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사점을 제시할 것이라고 본다”고 평가했다.

이 소장의 강연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태종, 집권은 말 위에서 통치는 도서관에서
태종은 특이하게도 악역을 스스로 선택한 인물이다. 그는 악역으로 역사 속에서 자신을 뚜렷하게 남겼다. 조선 개국 때는 정몽주를 죽이고 왕이 된 후엔 ‘왕자의 난’ 때 자신을 위해 싸운 처남들을 죽였다. 태조의 측근인 이숙번도 귀양을 보낸다. 공신 중의 공신에게 칼을 댄 것은 생각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조선을 법치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가 왕의 처남, 혁명동지라는 신분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우려가 있는 사람들을 미리 척살한 덕에 세종은 조선사에 유례없는 왕권을 누릴 수 있었다.

태종이 가진 지도자로서의 또 다른 미덕은 후계자를 잘 선택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다섯째 아들이었던 그는 누구보다도 적장자 계승을 원했다. 하지만 피의 숙청을 통해 법치를 이룬 조선을 이끌기에 양녕대군은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 때문에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태종의 이런 역할은 세종이 어떤 도전도 받지 않고 평화로운 시대를 보내도록 했다. 태종이 하드웨어라면 세종은 그 위에 꽃 핀 소프트웨어인 셈이다. 흔히 태종을 무인(武人)이라고 보지만 사실 그는 고려 말 급제한 문과 엘리트였다. 그는 나라를 세우는 것은 말 위에서 하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도서관에서 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던 사람이다. 태종은 악역이라 할지라도 역사가 부여한 역할을 알고 걸어간 인물로 기억돼야 한다.

적에 가담했던 백성을 의병으로 바꾼 힘
서애 유성룡은 선조라는 C급 지도자 아래서 훗날 자신이 쫓겨날 것을 알고도 자신의 길을 간 사람이었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 느닷없이 일어난 전쟁이 아니다. 전쟁 1년 전 일본 사신이 “내년에 쳐들어가겠다”고 선언했지만 조선은 이를 묵살하고 어떤 준비도 하지 않았다. 이때 유성룡은 인재를 천거하는데, 이순신과 권율이다. 문관적 무인이었던 이순신은 목이 뻣뻣해 툭하면 갇히거나 파직당했는데 그때마다 유성룡은 그를 끌어줬다.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능력을 본 것이다. 이순신을 전라좌수군절도사로 가게 한 것도 유성룡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선조는 도망가기 바빴다. 아예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서 살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때 유성룡은 “대가가 우리 땅을 한 발짝만 벗어나면 그때부터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닙니다”라고 반대한다.

선조가 이렇게 도망한 이유는 실록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적병 중 반이 우리 백성이라는데 사실이냐”는 선조의 말이다. 노비를 비롯한 사회 하층민이 왜군에 가담한 것이었다. 이들의 마음을 돌린 것도 유성룡이었다. 그는 면천법을 만들어 천민이 왜적의 머리를 베어오면 신분을 상승시켰다. 그러자 백성들이 의병에 가담했고 전세가 바뀌었다. 또 중강진에 ‘중강개시’라는 국제 무역시장을 열고 조선의 면포를 팔아 굶는 백성들을 살렸다. 하지만 유성룡은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바로 그날 실각했다. 선조가 조선이 되살아난 것이 명나라 군대 덕이라는 논리를 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성룡이 죽었을 때 서울 시민이 나흘간 자진 철시한 것은 당시 백성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준다.

정조, 수원 화성은 최초의 계획 상업도시
정조는 즉위 첫날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포한다. 대다수 대신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한 노론이었다. 정조가 이들에게 칼을 들었다면 또 한 명의 연산군이 등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절대 다수인 노론과 싸우는 대신 함께 가는 길을 택했다. 대신 남인을 육성해 노론 일당 독재를 다당제로 바꿨다. 또 양명학과 서학, 천주학까지 용인해 성리학 유일사상 체제에서 다원화를 추구했다. 재위 1년에 서자들도 벼슬에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서얼허통절목(庶孼許通節目)’을 선포하고 재위 3년엔 서자인 이덕무·박제가·유득공·서리수를 규장각 검사관에 특채했다. 이들은 단번에 조선의 지식 구도를 바꿨다. 북학파와 중상주의가 여기서 태동한 것이다.

또 정조는 수원 화성을 통해 농업 혁명, 상업 혁명을 일으킨다. 화성 앞 십자로(十字路)에 상가를 조성하고 호조에서 6만 냥을 풀어 상인들에게 무이자로 3년간 빌려준다. 이 덕에 화성 앞에는 서울의 육의전 같은 상가가 만들어진다. 또 화성 앞 매년 범람하는 진목천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고, 주변 황무지를 개척해 ‘대유둔’이란 농장을 만들었다. 분명 정조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화성을 만들었지만 행정도시이자 역사상 최초의 계획 상업도시가 되도록 설계했다. 정조의 화성 건설은 세종시 논란으로 시끄러운 현재에 큰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고 본다.

정조가 5년, 10년만 더 살았다면 정약용 같은 개혁 관료에 의해 개혁 정책이 계속 추진되었을 터다. 그랬다면 조선 후기 역사는 달라질 뿐 아니라 후에 조선은 멸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위의 세 사람에게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미래를 지향했다는 점, 왕성하게 독서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는 점, 자기 혁신을 통해 사회 개혁에 나섰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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