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상의 맛있는 나들이] 조계산 '보리밥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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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에서 만나는 밥은 달다. 신 김치 쪼가리에 맨밥도 좋다. 밥 한술 입에 넣고 고개를 들면 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흰 구름이 생선 토막으로 다가오고, 고개를 돌리면 맑은 계곡물과 그 위에 떠다니는 붉은 낙엽이 고깃국을 대신한다. '시장이 반찬'이란 말마따나 허기진 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청정한 산 공기가 입맛을 돋운 덕이기도 하다.

전남 순천시 조계산 중턱에는 20년 넘게 등산객의 허기진 배를 달래주는 '보리밥집(061-754-3756)'이 있다. 식탁도, 밥상도 없는 독특한 분위기의 음식점이다. 집 모양을 갖춘 것은 달랑 밥.반찬을 준비하는 부엌 공간과 주인 내외의 살림집이다. 손님을 받는 공간은 전후좌우, 그리고 머리 위까지 뻥 뚫린 숲 속이다. 식탁 대신 7~8명이 올라갈 수 있는 평상 20여개만 나무그늘 아래 여기저기 놓여 있다. 그 위에 걸터앉아 커다란 쟁반에 담아온 음식을 먹는다. 주말처럼 등산객이 많은 날엔 평상 잡기도 쉽지 않다. 그러면 그냥 산길이나 계곡에 주저앉아 먹기도 한다. 갑자기 비라도 내리면 먹던 쟁반과 밥그릇을 챙겨 비닐하우스로 대피해야 하는 소동이 벌어진다.

둥근 쟁반에 담긴 음식은 가지무침.애호박나물.부추무침.돌나물과 참나물.표고버섯나물.감자순무침.더덕양념 등.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운 채소와 푸성귀로 만든 반찬이 가득하다. 배추속잎과 열무청이 쌈거리로 오른다. 풋고추에 된장도 물론 있다. 다른 곳에서 맛보기 어려운 3년 묵은 김치도 있다. 붉은콩이 들어간 보리밥에 호박 시래깃국이 곁들여진다. 마지막으로 고추장과 참기름이 담긴 큰 대접도 따라 나온다. 한마디로 산비탈의 밭에서 나온 것으로 차려진'웰빙식'이다. 고추장 대접에 밥을 쏟아 담고, 이런 저런 반찬을 얹어 쓱쓱 비빈다. 한 술 크게 담아 입에 넣는다. 씹기 어려운데도 술술 뱃속으로 잘 넘어간다. 고추장이 들어갔는데도 역시 단 '산 밥' 맛이다. 동동주까지 한 잔 곁들이며 남은 산길 걱정을 '술 힘'에 맡겨버린다.

보리밥 일인분에 5000원, 동동주도 한 되에 5000원. 선암사에서 시작하든 송광사에서 출발하든 1시간30분가량 걸리는 등산길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4륜구동 차량이 올라갈 수 있는 작은 임도가 있긴 하지만 차량으로 오를 땐 산을 사랑하는 등산객의 따가운 눈총을 각오해야 할 듯. 그뿐만 아니라 산 밥의 단맛을 제대로 느끼는 일은 포기해야 한다.

유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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