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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한·일관계의 비상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한국에서 보는 일본은 상반되는 두개의 얼굴을 하고 있다.

지난주 뉴스위크는 일본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한국을 부러워하는 증후군' 을 커버 스토리로 대서특필했다. 내용을 보자.

"25세의 광고회사 직원 오쿠하라 스구루는 황군(皇軍)출신의 할아버지한테서 '조센징' 은 더러운 인간들이라는 세뇌를 받고 자랐다. 그러나 그는 한국을 처음 방문하고는 그의 할아버지와 같은 일본인들의 고정관념을 비웃고, 한국의 음악과 영화를 소개하고,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웹사이트를 만들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그는 일본의 한국화(韓國化)를 희망한다. "

"한국의 팝음악은 신선한 얼굴과 역동적인 사운드를 갈망하는 일본 음악팬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오사카의 그래픽 디자이너 야마모토 시게토모(30)는 매달 한국에 와 CD를 사서 자신이 디스크자키로 일하는 클럽에서 일본팬들에게 들려준다. 한국 가수들의 팝콘서트는 일본의 젊은 직장여성들과 학생들을 끌어들인다. " <뉴스위크 한국판 4월 11일자>

뉴스위크에 따르면 요즘 일본 여성잡지의 가장 인기있는 스토리는 한국여성들이 어떻게 완벽하게 피부를 가꾸는지에 관한 것들이다. 지난 1월 한국 유학생이 도쿄 전철역에서 술취한 사람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사건으로 일본인들은 한국에 대해 더욱 열광하고 있다.

요미우리 신문은 유학생 이수현의 희생은 "우리에게 사람이 숭고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고 말했다. 일본사람들의 이런 '한국 재발견' 을 상쇄하는 것이 일본의 또 하나의 얼굴인 극우분자들의 극성이다.

지난 2월 말의 어느 오후, 부슬비를 맞으며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를 처음으로 찾았다. 과거를 반성하기를 거부하는 일본 극우세력의 정신적인 고향이 어떤 곳인지를 보려고 갔다. 신전(神殿)앞 계단에 이르렀을 때 점퍼를 걸치고 장화를 신은 중년의 일본인이 뚜벅뚜벅 걸어와 동정을 살폈다. 이쪽의 걷는 폼이 아무래도 한국인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는 특히 위압적인 자세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방문객이 일본의 호국영령들에게 합장 정도는 할 것을 기대하는 것으로 보였다.

야스쿠니 신사의 직원이 아니면서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거동을 살펴 은근히 경건한 자세를 취하도록 유도하는 이런 점퍼 차림의 일본인이 집단을 이루면 '새역모'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가 된다. 도쿄도(都)지사 이시하라 신타로와 과거에 관한 망언을 일삼는 후안(厚顔)의 정치인들이 그들의 우상이다.

주일대사를 소환할 지경까지 악화된 한국의 대일외교는 딜레마에 빠졌다. 일본 정부가 검정을 통과한 역사교과서를 더는 수정할 힘이 없는 것은 확실하다. 대사소환, 항의사절단 파견도 실효를 거둘 수 없는 게 일본의 현실이다. 총리는 사임 직전에 있고 외무성은 기밀비 스캔들로 기능부전(不全)에 빠져 문부성에 소신을 밝힐 처지가 아니다.

파국을 피해야 한다는 말은 참으로 옳다. 그러나 "어떻게□" 라는 질문에 확실한 답은 없다. 한.중 공동전선, 대중문화개방 중단, 일본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선출 반대, 천황 호칭 변경도 소용없다.

야스쿠니 신사의 점퍼 입은 남자에게 충격을 주는 데 초점을 맞추면 오쿠하라 스구루와 야마모토 시게토모 같은 일본의 한국친구들을 소외시킨다. 지난해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에서 약속받은 70억달러 민간투자도 흔들린다.

한국의 대응책은 일본 정부를 움직여도 역사교과서의 추가수정을 얻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분명한 현실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지금부터는 역사교과서를 발행한 8개 출판사가 치열한 채택경쟁을 벌인다. 독소조항투성이의 후소샤(扶桑社)것이 실제로 일본 중학생들의 손에 가장 적게 들어가게 하는 데 전력을 쏟아야 한다.

감정적 대응은 후소샤를 돕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한국 정부는 먼저 국민에게 이런 현실을 솔직하게 설명하고 감정의 자제를 유도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역사교과서의 채택과정에서 최대한의 영향력을 발휘해 검정과정에서 한국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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