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일본 우경화 프로젝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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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가 주변 국가의 반발과 일본 내 양심적 지식인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우려했던 그대로 매듭지워졌다.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이하 모임)측의 교재가 일부 자구수정과 첨삭만을 한 채 전체적 맥락과 기조를 그대로 유지해 검정을 통과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교과서들도 일본군 위안부 기술을 삭제하거나 줄이는 등 종전의 입장에서 후퇴해 우경화된 입장을 보여줬다.

***皇國史觀 서술한 교과서

모임측의 교과서는 개개 사실의 진위 여부보다 그 논조와 사관에 근본 문제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과거사를 정당화해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황국일본의 신성함과 무궁성을 그려내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바로 일본의 군국주의화와 직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일본 교과서들은 일본측 사서에만 나오는 임나일본부설을 수용해 고대의 일본이 가야지방을 지배했다는 것을 역사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대륙정복의 대야망가로 묘사한다.

조선 침략을 위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자국의 독립과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서술한다. 한국병합은 국제법적으로 하자가 없고 마치 한국인이 이에 동의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한국을 식민지화해 근대화시켰다는 식의 식민지 미화적 입장도 보여준다. 중일전쟁 이후 노골적으로 자행된 강제동원 사실도 극히 일부만 다루면서 태평양전쟁의 불가피성을 내세워 정당화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침략행위도 '진출' 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침략성을 은폐하고 있다.

놀랍게도 이러한 논조와 주장은 과거에 한국을 침략하고 식민지배하면서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론적 근거로 삼았던 것들이다. 또한 패전 이후 수없이 터져 나온 망언의 기본 뿌리이기도 하다. 이제 망언의 논리구조가 그대로 교과서에 담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 침략과 전쟁으로 일관해 왔던 군국주의 일본은 패전 후 과거청산이 되는 것처럼 비춰졌다.

실권 천황제가 상징 천황제로 바뀌고 재벌이 해체되고 군대가 없어지는 등 외형적으로는 많은 부분이 개혁됐다. 그러나 냉전의 구조화가 전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면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일환으로 군국주의 일본의 해체작업은 왜곡 굴절됐다.

대륙침략을 주창하던 황국관료들이 정계와 관계에 복귀하는가 하면, 천황을 신앙화하는 군국주의 정신계승작업은 은밀하고 꾸준하게 진척됐다.

일본의 과거 회귀운동이 수면 아래에서 줄곧 이어져 온 것이다. 그러다가 경제부흥을 거쳐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면서 그에 걸맞은 정치대국과 군사대국을 모색하게 됐고 이것이 노골적인 '황국사관(皇國史觀)' 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교과서 문제는 단순히 교과서 서술문제가 아니라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내건 우경화 프로젝트 중의 하나로 판단된다. 오랜 기간의 정치적 의도가 그 결실을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주의사관(황국사관)측은 종전의 역사서술을 자기 학대의 자학사관(自虐史觀)과 반(反)일본적 유물사관에 입각한 것이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측의 국제적 음모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일본인의 원초적 감각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고 많은 호응과 설득력을 획득할 수도 있다. 특히 과거청산 없이 진행된 허구적 시민사회와 경제적 풍요로움 속의 도덕불감증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역사인식 바꾸기가 과제

이번 교과서 검정통과가 곧바로 일본에 큰 변화를 갖고 올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아직은 평화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떻게 역사가 반전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왜곡된 역사교육을 받은 세대가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끌어 갈 때 아시아의 전도가 어떻게 될까 심히 우려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올바름을 개척하기 위한 용기다.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문제가 터졌을 때만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일본의 역사인식을 바꿀 수 있도록 나서야 한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올바른 역사인식을 서로 공유하는 것은 일본과 우리 모두에게 부여된 과제다.

강창일 배재대교수 ·한일관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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