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 시대의 명인] 바디장 구진갑 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음(陰)과 양(陽)의 기운이 짝을 이뤄 천지를 만들었듯이 북과 바디는 생김새와 쓰임새가 서로 다르지만 한데 어울려 피륙을 만든다. 베틀에서 배(船)모양으로 생긴 북(紡錘)이 씨실(緯)과 날실(經)을 엮어 내려가고, 대(竹)를 가늘고 얇게 쪼개 만든 바디(筬)가 엮어진 씨실과 날실을 치면서 가지런히 골라주면 비로소 베가 모습을 드러낸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은 팔도 제일가는 세모시의 생산지다. 그곳에서 바디(베의 날을 고르며 실을 쳐서 짜는 틀).북.도투마리(베를 매서 감아두는 틀) 등 베틀의 부품이 생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한산면 종지리에는 베가 옷감의 주류를 이루던 한창 때 바디나 북을 전문으로 만드는 장인들이 모여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세모시가 산업화의 물결에 밀려 구진갑(具鎭甲.84.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중요 무형문화재 제88호)옹의 손끝에서만 바디장의 숨결을 찾아 볼 수 있다.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난 具옹은 23세가 되던 해 늦깎이로 바디 만들기를 배웠다.

엄격한 스승 이종석옹 밑에서 보낸 3년간 도제 생활은 "돈을 주더라도 다시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고 회상한다. 익숙하지 않은 칼질에 손을 베기 일쑤였고 작업을 제대로 못할 때마다 스승은 호되게 야단치며 매질했다. 具옹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한두번 든 게 아니지만 그때마다 떠돌이였던 자신을 거두어준 스승의 은혜가 고마워 접어뒀다.

대오리(얇은 대나무 조각)를 참빗살처럼 세운 바디는 얼핏 보기에 손쉽게 만든 것처럼 보이나, 꼼꼼한 손놀림이 필요한 베틀 부품이다.

바디 만들기는 바디살 제작부터 시작된다. 3~4년 된 대나무를 베어와 10~12조각으로 쪼갠 후 속살을 발라서 버린 대조각을 잘게 쪼개 햇볕에 한달 이상 말린다. 대오리가 마르면 조름대 위에 올려 놓고 다시 똑같은 크키와 굵기로 가지런히 잘라 바디살을 만든다.

그 다음 바디살을 바디틀에 끼워넣고 실로 엮어 맨 다음 가장자리에 기둥살을 대고 마구리로 양끝을 잡아맨다. 피륙의 촘촘함을 따질 때는 '새(繩)' 라는 단위를 쓰는 데 바디의 촘촘함과 성김에 따라 새의 정도가 정해진다.

특히 한산 바디로 짠 세모시는 다른 지방 무명.명주 베보다 더 가늘기 때문에 "마치 잠자리 날개와 같이 곱다" 라는 찬탄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도 옛시인의 허사가 됐다.

具옹은 "공장에서 나일론으로 천을 찍어내는 세상인데 어쩔 수 없지. 세모시를 짤 때도 주물로 만든 쇠바디를 사용하는데 누가 전통 바디를 쓰겠나" 라고 일찍부터 체념을 했건만 몇마지기 안되는 땅을 갈면서 틈틈이 바디를 만들고 있다. 애써 만든 바디를 내놓아도 팔리지 않아 이제는 장터에 나가지 않는다. 간혹 주문이 들어오지만 1년에 한두차례에 불과하다.

"왜 아직도 바디를 만드냐" 는 짓궂은 질문에 具옹은 "소일거리" 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자신이 손을 놓는다면 바디장의 맥이 끊긴다는 것을 具옹은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문의 041-951-2654.

서천〓이철재 기자

◇ 여행쪽지〓베틀에서 섬세한 아낙네의 손길로 짜이는 세모시가 특산물이다. 한필에 30만~60만원으로 비싸지만 내구성이 뛰어나 여름철 옷감으로 손꼽힌다. 한산모시관(서천군 한산면 지현리.041-951-4100)에는 전수교육관.전통공방.토속관.상설매장 등이 갖춰져 있다.

입장료는 어른 1천원. 희리산에는 해송으로 조성된 자연휴양림(서천군 종천면 산천리.041-953-2230)이 있다. 산책로를 걷다 보면 상쾌한 기분이 절로 들고 서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세모시.소곡주와 함께 자하젓은 서천이 자랑하는 제3의 특산품이다.

인터넷(http://www.sonsalmi.co.kr)을 통해 주문할 수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