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김길태 얼굴 이례적 공개…2004년 밀양사건 이후 처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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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한 본지 2009년 1월 31일자 4면.

경찰은 10일 부산 여중생 성폭행 살해사건의 피의자인 김길태(33)를 호송하면서 이례적으로 얼굴을 마스크 등으로 가리지 않았다. 반인륜적 흉악범의 경우 가해자의 인권보다 공익을 우선해야 한다는 여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지난해 연쇄 살인범 강호순의 얼굴은 공개하지 않았었다. 본지는 김길태의 얼굴 사진과 이름·나이를 이미 공개하고 있다. 본지가 흉악범의 얼굴 사진과 실명을 공개한 것은 지난해 1월 강호순 사건부터다. 당시까지는 얼굴 사진·실명을 비공개로 처리하는 것이 원칙으로 굳어져 있었다.

2004년 밀양 여중생 집단성폭행 사건 당시 피의자인 학생들의 신상이 공개된 뒤 인권침해 논란이 일었다. 그 뒤부터 경찰은 피의자 보호를 강화했다. 공개 수배돼 전단에 사진과 실명이 공개된 피의자라 하더라도 모자와 마스크를 씌워 얼굴을 가렸다. 이듬해 경찰청은 ‘인권 보호를 위한 경찰관 직무규칙’을 시행했다. “경찰서에서 피의자와 피해자의 신분이 노출될 우려가 있는 장면이 촬영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나 본지는 강호순 사건을 계기로 정치인·고위 공직자 등 공인과 함께 증거가 명백한 흉악범에 대해선 실명과 사진을 공개키로 정했다. 법조계, 법학 교수 등의 자문 과정을 거쳐 국민의 알 권리 보장과 사회 안전망 확보의 필요성이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용의자의 사생활·초상권 보장보다 앞선다고 판단했다. 또 추가 범죄 신고를 받고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공개가 필요하다고 봤다.

정부도 법 개정에 들어갔다. 지난해 7월 국무회의에서 연쇄살인이나 아동 성폭력 범죄 등을 저지른 흉악범의 얼굴과 이름·나이를 공개하는 내용의 ‘특정 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범행수단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특정 강력범죄이고 ▶피의자가 자백했거나 충분한 증거가 있으며 ▶공공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공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법안은 현재 국회에서 심의 중이다.

본지는 여아를 성폭행해 큰 상처를 입힌 혐의로 징역 12년 형이 확정된 조두순의 실명을 처음으로 공개(지난해 10월 6일자)했다. 이에 따라 피해 여아의 가명을 딴 ‘나영이 사건’은 ‘조두순 사건’으로 바꿔 불리게 됐다.

본지의 공개 원칙에 대해 박용상 변호사는 “사회적 관심이 크고 범죄를 입증할 증거가 명백한 사건의 피의자는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실명·얼굴을 공개해야 한다”며 찬성 입장을 밝혔다. 박 변호사는 “관련 법안이 아직 국회를 통과하진 않았지만 이번 사건과 같은 경우 익명 보도의 예외에 해당해 면책될 수 있다는 판례가 나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윤영철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장은 “공개 수배 중에 용의자를 검거하기 위해 얼굴과 나이·특징 등을 공개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미 검거된 이후 지속적으로 얼굴을 노출시킨다면 인권 침해의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뉴욕 타임스 등 미국·영국·일본 등의 주요 언론들은 강력범죄 피의자의 신상을 가감 없이 보도하고 있다. 증거가 명백한 때에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것이다. 미 연방대법원 판례도 범죄자도 공인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으로 본다. 미국의 메간법(Megan’s Law)은 상습 성폭행범과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자에 대해 사진과 주소 등을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권석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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