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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칼럼] 거품에서 현실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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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여러분은 내가 말한 것을 알아들었다고 믿을지 몰라도, 나는 여러분이 들은 것이 내가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의도적 '실언' 인데, 아마도 농담 비슷하게 진심을 전한 것 같다. 말투가 건방지기는 해도, 시치미 떼고 속내 감추는 연기부터 배웠을 고위 공직자의 태도치고는 오히려 솔직한 느낌마저 든다. 미국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그에게는 농담조차 심각한 해설 기사가 뒤따르곤 하지 않는가?

*** 美가계저축률 급속 하락

그러나 해설 없이 알아들은 말도 있다. 이를테면 "FRB의 고유 업무는 주가를 부양하는 것이 아니라 실업을 감소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일" 이라는 주장이 그러하다. 신경제로 불리는 10년 호황으로 미국 경제가 아주 잘 나갈 때 사람들은 그것을 그린스펀의 공으로 돌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호황에 먹구름이 끼고 경기가 삐걱대자 사람들은 재빨리 그린스펀 처방의 약발이 다한 것 아니냐고 실망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니, 증권 투자자들이 그에게 보내는 불만의 소리가 높을수록 역설적으로 미국 경제는 꿈 깨고 현실을 바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FRB는 주식 투자로 잃은 돈을 대신 물어주는 곳이 아니며, 주가를 떠받치기 위해 금리를 내리라는 철없는 요구는 이제 그만 끝내라는 그의 경고는 더할 나위 없이 옳다.

그린스펀의 이런 통찰은 미국 증시만이 아닌 미국 경제 전반의 건강진단에 꼭 필요한 절차다. 선진국 경제의 일반적 애로는 쓰고 싶은 만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 만큼 쓰지 않는 데에 있다. 케인스의 유식한 표현을 빌리자면 '과소 소비' 혹은 유효수요 부족의 불황이 그것이다.

그 원인은 나라마다 많이 다른데 일례로 일본은 돈이 있어도 저축을 위해 쓰지 않는 경우이고, 미국은 쓰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참는 경우다. 그렇다면 어디서 갑자기 '공돈' 이 생길 때, 일본의 소비는 큰 변화가 없지만 미국은 엄청나게 소비가 늘어난다. 그런데 주식 투기로 느닷없이 떼돈이 공돈처럼 굴러온 것이다. 실제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들어온 것으로 믿은 것이다.

한창 때 미국 주가에 40% 정도의 '거품' 이 끼었다니까 투자자가 이 거품 소득에 정신을 잃을 만도 하다. 이 거품을 믿고 번 것 이상으로 마구 쓰다 보니 최근 미국의 가계 저축률이 마이너스 수준으로 떨어졌다. 신경제 호황은 바로 이 거품 소득에 의한 소비 과열이 밑천이 됐다.

정보 기술(IT)의 발전은 이 거품 확산에 톡톡히 한몫을 했다. 그러나 그 정체는 여전히 불명한데 예컨대 생산 자극으로 부가가치 증대에 기여하는 효과와, 정보의 차별적 확산으로 사실상 분배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역효과를 차분히 검토하지 못한 실정이다.

이 기술만 믿고 수익 기반조차 점검하지 않은 채 나스닥 투전판을 휩쓴 닷컴 열풍은 결과적으로 매우 불행한 경험이었다. 지난해 1월 무려 2백50달러까지 치솟았던 인터넷 기업의 총아 야후의 주가는 현재 16달러 선으로 떨어졌다.

솔직히 나는 야후 주식의 적정가가 얼마인지 모른다. 그러나 2백50달러 수준에서의 소비와 16달러 수준에서의 소비가 미국 경제에 가하는 충격의 차이만은 - 10년 호황에 해마다 무역 적자가 기록을 깨뜨리는 역설을 - 분명히 알고 있다.

*** 주가보다 실업감소 초점

주식 거품이든, 정보 기술 거품이든 그것을 만들어낸 돈의 출처가 궁금하다. 국내 요인으로는 부유층 감세와 무지막지하게 노동자 해고를 단행한 '레이거노믹스 폭행' 이 있다. 해외 요인으로는 헤지 펀드를 앞세워 신흥시장을 초토로 만든 금융 세계화 작전을 들 수 있다. 투기 자본은 동남아에서의 외환 위기처럼 한바탕 국물을 챙기고는 미국으로 돌아가 증시를 받쳐주었다.

그러나 이런 행운이 영원할 수 없다는 데에 '경착륙'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저께 FRB는 올해 들어 세번째로 연방기금 금리를 0.5%포인트 내렸다. 교과서가 맞는다면 주가가 올라야 하는데, 더 많이 내릴 것을 바랐던 주식 투자자들의 반발로 오히려 떨어지고 말았다.

이제 그린스펀은 미국 국민이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도록 분명히 말할 책임이 있다. 중앙은행의 빽으로 전대를 채우려는 투기꾼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치기 위해서, 나아가 거품은 꺼지게 마련이고 투기로는 국민 경제가 살 수 없다는 평범한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아주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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