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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2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26. 단자사 무더기 인가

1986년 국회 예결위에서 내가 부실기업 정리 내용의 공개를 거부하며 곤욕을 치른 사실은 어느 신문에도 실리지 않았다.

나중에 조선일보의 오보로 밝혀졌지만, 공교롭게도 그때 김일성(金日成) 사망설이 터져나왔기 때문이었다. 예결위 기사는 국방장관 기자회견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86년 11월 17일 김일성 사망설로 큰 덕을 본 사람이 바로 나였다.

잘해도 좋은 소리를 못 듣는 부실기업 정리와 관련해 나는 '무엇으로' 욕을 먹을 것인지 고심했다. 그러다 부실 정리의 내용을 밝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욕을 먹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재무부 직원들에게도 나는 그렇게 말했다. 부실기업 정리 과정에서 천문학적 액수의 결손이 생긴다는 것을 국민들이 어떻게 납득하겠는가?

당장은 비밀에 부치되 언젠가는 사실을 그대로 공개하면 될 것이었다.

부실기업들이 생겨난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멀게는 정부의 개입, 오랜 관치금융의 관행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가깝게는 5공 정부가 금융자율화라는 이름으로 60여개나 되는 단자회사를 한꺼번에 인가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난 단자사들은 기업을 상대로 돈 장사를 하느라 있는 대로 돈을 쏟아부었다. 단자사들간에 과당 여신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등장한 이른바 완매채(完賣債)는 사채(私債)가 모습을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다. 때마침 중동 경기도 한풀 꺾였다. 정권은 말기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단자사들은 특정기업에 관한 악성 루머가 돌면 앞뒤 안 가리고 곧바로 그 회사 어음을 돌렸다. 어느 기업도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첫번째 제물이 국제그룹이었다. 어음을 못 돌리게 막다 보니 단자사들의 빚을 그대로 떠안은 은행이 부실화했다. 자칫하면 공(公)신용 체계가 무너질 판이었다. 공신용 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좌시하고 있을 정부는 없다. 어음을 못 돌리게 한 책임을 결국은 정부가 질 수밖에 없었다.

'설익은 이상론' 이 빚어낸 단자사 무더기 인가가 결과적으로 부실기업 양산이라는 화를 부른 셈이었다. 어찌 보면 '준비 안 된 개혁' 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97년 외환위기 당시 종금사 문제나 요즘의 투신사 빚 문제도 마찬가지다. 종국엔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길밖엔 없다.

문제는 철저한 자구노력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구조조정의 실천 정도에 맞춰 단계적으로 돈을 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당하고도(?) 욕만 했지, IMF의 조건부방식을 배우지는 못한 것이다. 단자사 무더기 인가는 고 김재익(金在益) 경제수석의 작품이었다. 5공 초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라고 했다는 金수석이었다.

당시 재무부 차관이었던 나는 졸속적인 단자회사 무더기 인가에 반대했다. 김수석은 나와 함께 반대 입장을 폈던 이규성(李揆成) 금융담당차관보(전 재경부 장관)와 나를 각각 전매청장과 경제기획원 차관으로 밀어냈다. 두 사람 다 명목상 승진은 했지만 사실상 좌천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획원의 이른바 '재무부 점령 사건' 은 이렇게 시작됐다.

李전장관과 내가 금융자율화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사채시장을 제도금융권에 편입시킨다는 이상은 좋았지만 준비도 없이 단자사 60여개를 한꺼번에 인가해 주었다가는 극심한 부작용이 빚어질 게 불보듯 뻔했다.

재무부 출신으로서의 현실론이었다.

80년대 부실기업 정리는 어떻게 보면 당시 단자사 무더기 인가의 뒤치다꺼리였다. 내가 그 역할을 떠맡았다면 이규성 전 장관은 IMF 체제 이후 그 뒷설거지를 한 셈이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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