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푸틴의 러시아 새로 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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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해 7월 자신의 대통령 취임 불과 2개월만에 북한을 전격적으로 방문했던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드디어 한국을 방문한다.

*** 관심밖 밀려났던 강대국

러시아 대통령의 방한으로는 1992년 이후 처음인 이 방문은 미국에 부시 대통령이 새로 취임했고 3월과 4월로 각기 예정되어 있는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訪美)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訪러를 앞둔 시점에서 성사된다는 점에서 세계의 이목을 다시금 한반도로 집중시킬만하다.

한-러 양국간에 이른바 "건설적 상호보완적 동반자 관계"를 원칙적으로 재확인하는 것 위에 얻어 낼 수 있는 구체적 성과는 어떤 것일까?

1990년 수교 당시의 과장된 상호 기대가 차츰 실망으로 대체되면서 양국 관계는 서울에서나 모스크바에서나 다 같이 관심의 2선으로 밀려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일찍부터 한반도나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이 영향력을 독점하는 것을 방치하지는 않을 것임을 천명했으며 지난 6월의 역사적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한 관계가 급격히 진전됨에 따라 남북한 양측과의 균형된 관계의 재확인은 긴급한 과제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는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화해 정책과 그에 따른 북한의 변화를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특히 미국의 NMD 계획에 대한 우리와 러시아의 입장이 일치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기대를 걸고 있다.

한반도 문제는 남북 양측간의 평화적 대화를 주축으로 하는 다국적 협의를 통해야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러시아의 일관된 입장이었으니 북한측의 태도 변화로 6자회담이 성사된다면 러시아로서는 한반도에서 평화정착 뿐 아니라 궁극적인 통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의 방한에 거는 러시아측의 보다 큰 기대는 경제관계의 활성화에 있다. 한국은 러시아를 북한에 대한 지렛대로만 활용하려 할 뿐 교역에서나 투자에서나 진정한 경제 파트너로 받아드리기를 주저해 왔다는 것이 러시아측의 가장 큰 불만이었다.

투자환경의 불안정, 법적 기틀의 미비 등 그에 대한 러시아측의 책임도 컸음을 인정하지만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푸틴 대통령의 취임 이후 러시아가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되찾고 경제가 성장세로 돌아선 한편 남북관계가 전격적으로 개선됨에 따라 한러간 경제관계의 부진을 만회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러시아는 경의선만 아니라 평양-원산선이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연결된다면 그것이 침체에 빠져있는 러시아 경제에 큰 활력을 넣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발전소를 비롯한 북한의 인프라 구축에는 러시아의 기술과 한국의 자본을 배합하여 투입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러한 기술제휴를 한국에 대한 부채 탕감의 수단으로 일부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러시아가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기 판매에 관한 것이다.

국내 문제 해결에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두고 현실에 맞는 실리중심 대외정책을 추구하고 있는 푸틴은 무기수출국으로 러시아가 가지고 있는 힘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입장이지만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북한의 반응도 의식하고 또 과거 잠수함 수출문제로 이용만 당했다는 부정적 인식도 남아 있고 해서 매우 신중하게 각별한 준비를 갖추고 나올 것이 틀림없다.

*** 경제.외교 협력 확대 기대

푸틴 대통령의 뒤늦은 듯한 방한은 매우 환영할만한 일임에 틀림없다.

처음으로 우리 국민은 러시아의 새 지도자를 가까이 접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며 러시아와의 관계를 지나치게 소홀하게 다루어 왔다는데 대한 중요한 반성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양국 관계나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 경제적 힘의 관계의 세계적 변화, 어느 맥락에서 보나 양국간 관계강화를 위한 협상 게임에서 공은 지금 우리측에 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기회가 좋은 만큼 도전도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다.

러시아의 어느 신문은 북한의 인프라 구축에 러시아의 기술을 활용하자는 제의에 대한 우리측 반응이 러시아와의 신뢰구축과 북한과의 신뢰구축을 한꺼번에 가늠할 수 있는 리트머스 종이가 될 것이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우리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냉철한 이성으로 멀리 내다보며 실리를 추구하는 자세로 그 쪽의 제의를 신중하게 검토할 뿐 아니라 양국간의 교역 수준이 겨우 20억불대에 머물고 있는 실정에 대한 우리측의 답답함도 호소하고 그 쪽에서 생각해 내지 못하는 창의적 타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도록 준비를 서둘러야 될 듯 하다.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양국간에 진정한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냉철한 현실인식,특히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토대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李仁浩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주러시아 대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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