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바둑] 이세돌, 이창호 큰 벽 넘을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바둑인들이 즐겨 쓰는 신구미월령(新鳩未越嶺)이란 문자가 있다. '어린 비둘기 아직 재를 넘지 못한다' 는 뜻이다. 그렇다면 지금 막 비상을 시작한 이세돌이란 비둘기는 이창호라는 높은 재를 과연 넘을 수 있을까.

바둑팬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이창호9단과 이세돌3단이 LG배 세계기왕전의 우승컵을 놓고 운명적인 격돌을 벌인다. 5번 승부의 첫판이 26일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우승상금(2억5천만원)도 놓칠 수 없지만 이 승부에 걸린 자존심의 무게는 상금액수를 훨씬 뛰어넘는다.

지난 10년간 이창호라는 이름 앞에는 '무적' 이란 두 글자가 붙어다녔다. 한국을 휩쓸고 다시 세계를 휩쓸어가는 그의 초인적인 실력에 맞설 자는 아무도 없어보였다. 그런 이창호가 지난해 한국의 MVP를 이세돌3단이란 8년 후배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건 한동안의 부진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이창호라는 최강자에게 뭔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창호는 점점 강해질 것이다" 고 서봉수9단은 말하곤 했다. "점점 무적이 되어 조훈현9단보다 더 오랜 수명을 자랑할 것이다. "

그런데 만26세가 된, 한참 물이 올라 더욱 완벽해져야 할 이창호에게 지난해부터 이상한 징후가 보였고 그 징후는 해가 바뀌었음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9단의 올해 전적은 6승5패로 90%를 넘나들던 본래의 이창호에 비해 승률이 몹시 저조하다.

번번이 하는 얘기지만 바둑 외길을 달려온 이9단은 1인자가 된 뒤 세상사에 대한 관심 폭이 넓어지면서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됐을 가능성이 크다. 전보다 활발해지고 친화적인 그의 행동거지에서 이런 점이 감지되곤 한다. 그런데 바둑은 '집중력의 싸움' 이며 그 모든 것들은 집중력 약화와 직결된다.

이창호는 젊은 고수들이 으레 겪는 "바둑이 인생의 전부인가" 라는 홍역을 지금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9단은 그러나 잉창치(應昌期)배에서 우승한 여세를 몰아 신예의 기수 이세돌을 격침시키려 한다. 그는 LG배마저 순조롭게 우승한다면 올해 10억원이 훨씬 넘는 역대 최고의 소득을 올릴 수 있다. 여기에 후배의 도전이란 점도 이9단의 전의를 자극하고 있어 이9단은 오랜만에 최고의 집중력을 보여줄지 모른다.

애석한 것은 팬들의 기대를 한몸에 모으고 있는 이세돌3단 쪽의 상황이 그리 좋지않다는 점이다. 그는 절정의 연말을 보낸 뒤 심지가 다 타버린듯 올해 들어 1승3패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32연승으로 질주하던 '불패소년' 의 이미지와 영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들은 "대결이 시작되면 이세돌도 달라질 것" 이라고 말한다. 이번 대결은 이9단에게 커다란 고비이지만 이세돌에게도 중대한 시험이기 때문이다.

박치문 전문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