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빚진 우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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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올림픽 내내 빚진 마음이었다. 메달을 딸 때마다 기쁘고 감사하면서도 “아, 우리는 저 어린 것들에게 빚만 지고 있구나”라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번 올림픽으로 국가 브랜드 가치가 6조원을 넘었다는 경제적 타산 때문이 아니다. 이 나라는 이번 게임을 통해 달라졌다. 스스로도 ‘우리가 언제 이렇게 됐나’고 돌아보게 됐고, 밖의 눈도 ‘코리아가 저런 나라였나’라고 다시 보게끔 됐다. 이제는 어제의 코리아가 아니다. 이것을 누가 해냈는가? 20살 남짓의 우리 아이들이다. 어른들이 세종시다, 4대 강이다 싸우고 있을 때 우리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삼성이 빙상경기를 위해 지난 10여 년간 100억원대를 후원했다고 한다. 아무도 관심을 쏟지 않던 때 이들을 후원하고자 했던 그 안목, 그 능력에 우리는 역시 빚을 졌다.

우리 모두는 자기 힘으로만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렇게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공동체라고 부른다. 글로벌 시대라고 하지만 공동체의 단위는 나라다. 왜 태극기가 올라가면 기쁜가? 그것이 우리를 상징하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나부끼는 듯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공동체란 한 식구로 산다는 의미다. 한 사람이 잘하면 그가 속한 집단 전체가 잘하는 것으로 인정해 준다. 삼성·현대·LG가 잘하면 한국 기업 모두의 신용이 올라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일등국가로 인정받으면 그 나라의 국민은 모두 일등국민이 되는 것이다. 선진국이건 후진국이건 사람의 능력은 비슷한데 왜 선진국 사람의 수입이 몇 배 더 높은가? 나라가 일등이기 때문이다. 그 나라 안에 있기만 하면 같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속해 있는 나라 덕분에 몸값을 더 높이 받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공동체에, 사회에 빚을 진 사람들이 많은 나라가 선진국인지도 모른다.

일터에서도 마찬가지다. 회사 이름이 높아지면 그 구성원 모두가 더 높은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다. 같은 이치로 각 분야에 능력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는 그 덕을 보는 사람도 많아지게 된다. 그런데 스포츠에서는 앞선 사람을 인정하면서 왜 다른 분야에서는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을까. 스케이트가 10년의 투자와 노력의 결실이라고 한다면 다른 어떤 분야에서는 일생이 걸려야 결실을 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땀 흘리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더 대접해야 한다. 이는 동시대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훌륭한 선조를 두었다면 후손은 선조의 덕을 보게 되어 있다. 우리가 이 정도로 올라선 것은 지난 세대의 땀과 능력 덕분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지난 세대에 빚진 사람들이다.

세상에는 두 가치관이 존재한다. 하나는 빼앗기며 산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덕을 보며 산다는 생각이다. 전자는 부정의 생각이요, 후자는 긍정의 생각이다. 전자는 사회에 갈등과 투쟁을 빚어 내고, 후자는 협력과 공생을 만들어 낸다. 공산주의는 전자를 부추겨 혁명을 했지만 그 혁명은 실패했다. 인간 사회의 본질은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갈등과 투쟁을 가르치는 교육은 사회를 패망으로 끌고 간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가르쳐야 한다. 너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한다.

김연아의 가냘픈 어깨에만 짐을 지워 선진국으로 올라설 수는 없다. 박수 치고 좋아했던 것으로 끝낼 수 없다. 우리도 빚을 갚으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올림픽 때 했던 것처럼 언제나,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 노력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명예롭게 대접해 주는 것이다. 앞서 가는 사람들에게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평화롭고 번영된 선진국으로 올라서게 될 것이다.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