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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점자 만든 박두성,美學의 천재 고유섭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숨 가쁜 개항기에 ‘근대로의 여정’에 시위를 당겨준 이는 안골 내리교회의 담임 존스(한국명 조원시) 목사였다. 그는 교회 구내에 어린이들을 모아 우리나라 최초로 초등과정의 신학문을 가르쳤다. 훗날 학교 이름을 '영화학당'이라 짓고 교사를 늘려나갔다.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인공 이길용 기자, 최초의 여성 박사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 유아교육의 선구자 서은숙 박사, 교육자 김애마 이대 사범대 초대 학장 등을 배출했다.

존스 목사는 또 사상 최초의 해외이민을 도운 주인공이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떠난 초기 이민자 상당수는 내리교회 신자였다. 이들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댔고, 광복 후 인하대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일제 강점기에 백성들의 삶은 더욱더 강퍅해져 갔다. 군국 일본의 굴절된 프리즘을 통해 ‘근대화’는 왜곡되고, 그들은 내선일체·궁성요배를 강요하며 총칼로 민족의 정체성까지 말살하려 들었다.

그 무렵인 1913년 박애의 큰 뜻을 품고 제생원(濟生院) 맹아부에 들어가 교육의 길에 나선 선구자가 있었다. 송암 박두성(朴斗星) 선생이다. 당시 맹인 교육계는 점자 교과서조차 없는 열악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일본 점자만은 가르칠 수 없다'며 한글 점자 창안을 결심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26년 11월 ‘한글 점자’를 완성했다. 그것은 시각장애인에게 훈민정음 창제에 비견되는 복음이었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200여 종의 점자책을 간행하고 1963년 작고할 때까지 장애인 교육사업에 헌신했다. 생전에 점자 기념일이면 “한글 점자만은 남북 통일을 이뤘다”며 흐뭇해하곤 했다.

우현 고유섭(高裕燮) 선생은 멸실돼 가는 민족문화를 지켜내야 한다는 뜻을 품고 미술사학을 전공한 석학이다. 1927년 경성제대 문과에 입학할 시절 문학평론가 김동석, 의학박사 신태범 선생과 함께 ‘인천 3수재’로 유명했다. 그런 수재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미술사를 전공으로 택했다는 것은 남다른 풍모를 엿보게 한다. 선생의 비장한 학구열은 ‘우리 것’을 지키려는 외로운 투쟁이었다.

40세로 세상을 뜰 때(1944년 6월)까지 130편에 달하는 방대한 논문을 남겼다. 그 성과들은 오늘날 ‘한국 미술사에 흐르는 미학의 물줄기는 모두 고유섭이라는 수원지에서 흘러 나온다’는 찬사를 낳는다. 92년 새얼문화재단(이사장 지용택)은 제1회 새얼문화대상 수상자로 우현 선생을 선정했다. 인천의 명예와 자존심의 표상이 된 그의 동상은 인천시립박물관 앞뜰에 서 있다.

일제에 항거하던 이들은 일제 패망 후 곧 ‘조국 독립’을 맞이할 줄 알았지만 광복은 미 군정 체제로 이어졌다. 좌우 대립과 남북 분단 이후 일본 유학파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죽산 조봉암(曺奉岩) 역시 정치적 꿈을 펼치려 했다. 46년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라는 서신을 발표한 뒤 공산주의와 결별한 죽산 선생은 초대 농림부 장관, 국회부의장 등을 지냈다. 52년에 인천 출신으로는 최초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56년 제3대 대선에선 야권 단일 후보로 출마해 무려 216만 표를 얻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죽산 선생에 위협을 느낀 당국은 느닷없이 그의 ‘평화통일론’을 트집 잡아 구속했다. 59년 대법원은 죽산에게 '북한의 공작금을 받았다'며 사형을 확정하고 그해 7월 31일 형을 집행했다. 두 차례 대선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은 현역 야당 대표의 재심 청구를 법원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학계는 이를 자유당 정권의 ‘사법살인’으로 본다.

그에 비하면 운석 장면(張勉) 박사는 행운의 정치인이다. 아버지 장기빈의 영향을 받고 자란 운석은 인천사립박문학교를 거쳐 수원농림고, YMCA영어학교, 미국 맨해튼 가톨릭대를 졸업했다. 1925년 귀국 뒤 교육자로 활동하다 정계에 입문해 제헌국회의원, 유엔총회 한국 대표, 초대 주미 대사로 일했다. 1951년 국무총리로 발탁됐지만 이듬해 사임했다. 4·19 후엔 내각을 책임진 국무총리로서 민주·자유를 지향한 정책을 펴나갔다.

그는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9개월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정치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한때 투옥까지 당했지만 말년엔 종교생활에 전념했다. 조봉암과 장면은 인천이 낳은 거목이요, 한 시대를 이끈 큰 인물로 기억된다.

또 한 사람, 세인들이 존경하고 추억하는 이가 있다. 교육계의 사표 길영희 선생이다. 평북 희천 태생인 그는 경성의전 재학 시 3·1만세운동에 참여해 학적을 박탈당했다. 30세에야 일본 히로시마(廣島)고등사범을 졸업하고 교단에 섰다. 36세 때 도산 안창호 선생으로부터 감화를 받아 인천 만수동에 후생농장을 만들어 농업입국의 뜻을 키웠다. 그러다 지역 유지들의 추대를 받아 인천중·제물포고 교장을 역임하면서 민족교육 수립에 진력했다. 학생들에게 ‘민족의 소금’ ‘양심의 등불’이 될 것을 역설했던 길 선생의 교육 신념은 ‘돌대가리’란 별호를 낳았다.

하지만 그가 길러낸 제자들은 국가 동량으로 자랐다. 창씨개명을 끝내 거부한 민족주의자, 명문 인천중·제물포고를 키워낸 길영희 선생의 발자취는 크고 아름다웠다.

조우성 시인·계간 '리뷰인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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