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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들까지 만세 부르게 한 3·1운동의 주권의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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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1919년 3월 29일 수원 종로거리에서는 김향화가 이끈 30여 명의 기생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가로를 행진했다. 이 사진은 종래 서울 종로를 행진하는 여학생들의 시위 모습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3·1운동은 이 땅의 민초들을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서게 한 획기적 이정표였다. (출처 : 『한일병합사 : 사진으로 보는 굴욕과 저항의 근대사』, 눈빛, 2009)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민족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며,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인류적 양심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올바르게 바뀌는 커다란 기회와 운수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워 보이는 것이다.” 최남선이 기초하고 이광수가 다듬은 ‘독립선언서’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가 일제로부터 민족적 해방과 독립을 싸워 얻는 것과 함께 신분과 성별을 넘어 사람들 모두가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나라를 세우는 것임을 깨닫게 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 안 팔각정에 올라선 경신학교 학생 정재용이 큰 목소리로 낭독한 독립선언서는 4월 말까지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1214회의 만세운동을 추동(推動)했다. 그때 일제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알려진 비운의 황제 고종에 대한 연민과 충성심에 이끌려 거리로 나섰던 민초들은 3·1운동을 통해 몰락한 왕조에 충성하는 백성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국민국가 세우기를 열망하는 민족으로 우뚝 섰다. 민초들의 가슴 깊이 민족적 일체감과 시민의식을 불어넣은 3·1운동은 일제하 독립운동을 지탱한 버팀목이자 이끈 추동력이었다.

학생·농민·노동자만 그 대열에 함께했던 것은 아니다. 4월 1일 아우내 장터 시위를 주동한 유관순이 모진 수형생활을 하던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는 그보다 3일 앞선 3월 29일 수원에서 일어난 기생 30여 명의 시위를 이끈 김향화도 함께 갇혀 있었다. 그때 사회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이들도 이 땅의 역사가 그들이 만들어 가는 역사임을 깨달은 주체로 거듭났다.

민주 공화정 수립을 열망하는 민초들의 주권의식은 그해 4월 세워진 상해 임시정부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확호불발(確乎不拔)의 이상으로 아로새겨졌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함.” 앞으로 올 새로운 나라는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의 부활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남녀 동권의 민주주의 국가요, 의회가 민의를 대변하는 공화정이라는 점을 못 박았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기미년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로 시작하는 1948년 제헌헌법의 전문은 대한민국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웅변한다. 3·1운동 91주년을 맞는 오늘. 다원화된 우리 시민사회 번영의 첫 디딤돌을 놓아준 선열들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의 진로를 비출 등대로 훤히 빛난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