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경기 바닥 쳤습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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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86년 1월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 후 몇초 만에 공중에서 폭발했다. 직경 0.28인치의 '오링(O-ring)' 이란 부품 하나의 결함이 사고 원인의 전부였다.

미 항공우주국(NASA) 실무자들은 오링의 설계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수십차례 지적했으나 "달을 정복한 우리가 실패할 리 없다" 는 논리에 묻히고 말았다. NASA 본부는 "부품 때문에 발사를 연기하면 우리 체면이 뭐가 되느냐" 며 밀어붙였다.

미 케네디 대통령은 61년 4월 카스트로 암살을 위해 쿠바 피그만 침공을 결정한다. 미 동부 하버드대 출신들이 백악관 안보회의를 주도하면서 "대통령을 만장일치로 지지해야 한다" 며 반대 의견을 묵살했다. 미국은 이 침공에 참패해 국제망신을 당했다.

두 사례는 '우리는 실패할 리 없다' 고 생각하는 집단사고(集團思考.Groupthink) 때문에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참사가 생기는지를 보여준다.

미 예일대 정치심리학자인 어빙 재니스 교수는 『집단사고의 희생자들(Victims of groupthink)』이란 책에서 "응집력이 강하고 폐쇄적이며 충성심을 강조하는 조직에 이런 현상이 많이 나타난다" 고 지적했다.

국내에서도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지는 사례가 많다. 기업이나 정부든 권력이든 학연.지연.실세.측근.가신(家臣)이란 이름으로 똘똘 뭉친 그룹이 "우리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 며 건전한 비판을 배척하기 때문이다.

YS시절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직전까지 "위기가 아니다" 고 우긴 경제관료들이야말로 객관적인 증거들을 무시한 채 집단사고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한국은행을 비롯한 여러 전문기관들이 외환위기를 경고하는 보고서를 내놓았으나 '혼자' 만 아니라고 우기다가 국난(國難)을 당했던 것이다.

최근에도 집단사고의 징후가 곳곳에서 고개를 든다. 여권의 일각과 과천 경제부처가 경기를 보는 눈에서 위험신호를 읽을 수 있다.

경제지표는 온통 빨간 색이고 연구소들은 경기가 예상보다 둔화할 것이라며 전망을 연거푸 수정한다. 피부로 느끼는 경기는 더 나쁘다.

기업인들은 "올해가 지난해보다 어려울 것" 이라고 한다. 백화점들은 매출이 줄어드는 현상이 예사롭지 않다고 긴장한다. 소비가 움츠러드는 게 시작에 불과하다고 진단하는 현장 전문가도 많다.

그런데도 청와대와 민주당의 고위 관계자들은 자금시장이 좀 풀리는 현상을 보고 "경기가 바닥을 쳤다" 고 느끼는 모양이다. 경제관료들은 "어렵지만 위기는 아니다" 고 한다.

재정경제부 등 경제부처 관리들은 지난해 하반기에도 낙관론을 폈다. 경기가 겨울에 바닥을 친다고 내다봤다. 요즘엔 한발 물러섰으나 낙관론을 애써 감추려들지는 않는다.

재경부가 12일 '최근 경제동향' 이란 자료를 배포하면서 "우리 경제가 1분기를 소저점으로 해서 2분기부터 회복국면으로 접어들 가능성이 있다" 는 내용을 명시했다가 지우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경제가 관료들의 전망대로 회복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경제이론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모이기만 하면 경제를 걱정하는데 경제를 전문으로 하는 관료들만 "잘못될 리 없다" 고 '뭉치는' 집단사고가 문제다.

경제관료들이 집단사고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한번쯤 '종합검진' 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IMF를 극복했다는 자신감에 취한 나머지 "우리는 뭐든지 해낼 수 있다" 며 그룹싱크에 젖어 있다면 그 자체가 이미 또다른 위험신호다.

이종태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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