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대학이 교육을 국제화하는 까닭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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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편치 않으신 아버지와 밀린 연구를 팽개치고 설 연휴에 타국의 벌판에서 눈보라와 추격전을 벌인 것은 국제처장이라는 대학가의 신종 직종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학생이 대학생활의 한 학기나 일 년을 외국에서 보내고 싶어 한다. 유력 언론들은 외국인 학생 수와 외국 대학과의 교환학생 수라는 잣대로 대학의 국제화를 평가하고 있다. 대학평가에서 밀리면 입학생의 질과 기부금 실적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대학 간에는 외국인 학생을 유치하고 학생 교환을 확대하는 전쟁이 벌어진다. 전국 대학의 국제처장들이 유령처럼 세계를 떠돌고 있다.

얼마 전 미국 남부의 내슈빌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던 ‘티파티 국민대회’가 마음에 걸린다. 요즘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보수우익 단체려니 했지만 연사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시처럼 귀에 박힌다. 한 연사는 ‘투표(vote)’도 제대로 발음할 줄 모르는 외국인들이 빨갱이 오바마를 백악관에 보냈다고 주장한다. 미국을 다문화주의 종교집단에서 해방시켜 전통 유대·기독교의 손에 돌려주어야 한단다. 훨씬 세련되어진 건 사실이지만 반세기 전까지 미국 남부를 지배했던 KKK단을 연상했다면 필자의 지나침일까?

하지만 이런 걱정은 워싱턴에 도착해서 사그라졌다. 그곳에는 국제화를 담당하는 미국 대학의 간부들이 대학 교육의 국제화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매우 근본적인 문제들이 논의되고 있었다. 교육 국제화의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하나? 외국을 경험한 학생의 가치관과 학업능력에는 과연 변화가 있었나? 교육의 국제화를 위해 교양 과정은 어떻게 개편해야 할 것인가? 교육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논의를 하고 있었다. 부끄러워졌다. 늘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업무에 쫓겨 엄두도 못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학은 근본적인 질문들을 뒤로 한 채 재정난에 쫓겨서 혹은 신문사의 평가가 두려워 숫자 늘리기에 급급하고 있다. 외국인 학생과 교수를 별도의 캠퍼스에 모아 대량 유치하면 본교의 학생들은 어떻게 국제화시킬 것인가? 우리 학생보다 못한 외국학생을 유치하고, 우리 학교보다 못한 외국 학교에 학생을 보내놓고도 국제화 잘 했다고 칭찬할 일일까? 대학도, 평가기관도 국제화의 진정한 목표가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해야 한다.

교육 국제화의 진정한 목표에 대한 생각은 필자의 대학처럼 가톨릭 예수회가 창립한 대학들이 주최한 세션에 앉아 있으면서 차분히 정리되어 갔다. 낯선 문화 속에서 내가 그렇게 기대고 있던 믿음과 가치는 산산조각이 난다. 그러면 묻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를. 아찔한 허공에서 나는 그저 우연과 습관으로 뭉쳐진 덩어리임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깨달음 속에서 나와 다른 습관 사이에 숨겨져 있는 교감의 틈을 발견한다. 다른 믿음과 다른 가치와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온종일 외국인들과 떠들다 방으로 들어오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국제화가 덜 된 탓이다. 그래도 즐거웠던 것은 미국 대학 간부들의 언어 속에서 국제화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유창한 영어 곳곳에 남미·인도·프랑스의 악센트가 숨어 있다. 이들이 미국 대학의 교육을 담당하는 한 내슈빌의 티파티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이 큰 힘을 떨칠 날은 없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텔레비전을 켜니 오노가 이동통신 광고를 하고 있다. 발보다 손과 입이 빠른 오노. 그러나 미국이 그를 영웅시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미장원을 하는 일본인 홀아버지 밑에서 어렵게 자라 마침내 겨울올림픽 최다 메달을 획득한 미국인.

미국이 강한 것은 결국 다문화주의 덕이다. 학문·예술·비즈니스·스포츠 곳곳에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가 숨 쉬고 있다. 우리도 ‘단일민족’의 환상에서 과감히 벗어나 다른 문화의 힘을 곳곳에서 흡수해야 한다. 그리고 외국계 한국인이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힘을 불어넣도록 해야 한다. 백남준씨의 말이 생각난다. 한국인이 강한 것은 비빔밥을 통해 영양을 골고루 섭취한 덕분이라고. 그리고 그의 비디오 아트도 비빔밥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송의영 서강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