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영빈 칼럼

정치적 내란 상황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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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미국의 유력 신문들은 대선 후보 TV 토론이 끝날 때면 사설을 통해 지지후보를 밝히는 게 관행이다. 뉴욕 타임스도 지난 17일 케리 후보를 지지하는 사설을 썼다. 지지 사설을 대충 요약하면 이렇다. 부시는 4년 전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통치권(mandate)에 결격사유가 있는 만큼 대통령이 중도적 정책을 펼 것으로 국민은 기대했다. 그러나 부시는 이런 기대를 저버리고 정부를 극우 쪽으로 몰아갔다. 부시가 국민으로부터 진정한 통치권을 위임받은 것은 9.11사태였다. 비탄에 빠진 국민을 등에 업고 어떤 희생이든 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에는 한계가 있어 고작 내놓은 게 세금감면과 이라크전이었다. 전쟁을 치르면서도 부자들의 세금을 감면해주겠다는 대선공약에 대통령은 집착했다. 급격한 상황변화에도 불구하고 지도자가 자신의 정책 우선순위를 바꾸지 못하는 능력 부재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탄핵 기각 이후 실망스러운 행보

사담 후세인에 대한 부시의 태도는 정책이 아니라 광신에 가깝다.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만 해도 부시는 국제사회와 미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라크와 알카에다 관련설, 후세인의 핵 개발 임박설 등이 정부 자체 조사로도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결과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이라크전은 웃음거리가 돼 버렸다. "지난 4년간 불필요하게 희생된 인명을 생각하면 우리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하다. 역사는 부시에게 영웅적 역할을 맡겼지만 그는 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잘못된 길을 가고 말았다." 그래서 뉴욕 타임스는 존 케리를 대안으로 생각하고 그를 지지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우리의 대통령은 어떠한가. 노무현 후보는 득표율 2.3% 차이로 힘겹게 당선됐다. 인수위 시절부터 국정수행능력에 대한 여러 의문이 제기됐고 급기야는 지난해 10월 대통령직을 내걸고 국민 심판을 받겠다는 재신임 선언을 스스로 하게 됐다. 노 대통령은 그 후 탄핵정국-총선을 거쳐 지난 5월 헌재의 탄핵 기각으로 헌법기관으로부터 대통령직을 재신임받는 사상 초유의 대통령이 됐다. 그때 다수 국민은 기대했다. 코드.패거리.분열.이념논쟁을 벗어나 이젠 보다 통합.중도적 실사구시를 통해 국민의 마음을 쓰다듬고 신바람을 불러일으킬 마당을 마련하길 바랐다. 국력을 한곳으로 집결시켜 나라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 창출에 전념할 정책을 내놓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 후 줄지어 쏟아진 이른바 개혁입법안을 보라. 미래지향적이기보다 과거지향적이고 갈등통합적이기보다 갈등조장적이며 아직도 민주.비민주, 주류.비주류를 가르는 편 가르기식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정신적 내전을 거쳐 정치적 내전 상황까지 예고하고 있지 않은가. 과거사 규명법으로 국민 모두의 족보를 캐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그나마 지탱하던 학교를 사학법으로 흔들고 있으며 신문 관련법으로 신문 시장과 언론 자율권을 정권이 옥죄려 하고 있다.

보안법이란 간첩 또는 체제 위협 세력을 색출하기 위해 존재하는 법이다. 달라진 남북화해 시대에서 생사람 잡지 않고 간첩 잡는 데만 주력할 수 있도록 법을 고치면 된다. 국민은 국가보위의 책임을 대통령에게 위임했다. 국민 70% 이상이 폐지안에 반대하고 있고 간첩을 처벌해야 할 검찰이 문제점을 들고나오는데 대통령이 폐지론에 앞장서고 집권당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이 나라 보위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경제는 추락하고 있는데 선거공약만 내세워 국민적 합의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못한 수도 이전을 강행하다가 마침내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받는 이 무모함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고칠 건 고치고 미룰 건 미뤄야

대통령 임기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 여당의 질주를 막고 야당을 논의의 장으로 불러내야 한다. 비록 그 법안들이 이상과 선의를 담고 있다 해도 법은 현실에 맞아야 하고 정치는 현실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고치고 절충하고 보완하고 미룰 것은 과감히 미뤄야 한다. 갈등 분열적인 것은 통합 조정 쪽으로 바꾸고 과거지향적인 것은 뒤로 미루고 미래지향적인 어젠다를 내세워 국민이 신바람을 느낄 분위기 쇄신부터 해야 한다. 수도 이전 백지화로 앙앙불락할 게 아니라 수도권 과밀화 해소와 국토 균형발전을 위한 대안 마련에 중지를 모아야 한다. 국민대화합의 기운을 조성하고 힘을 모으기 위해 정치권 전체가 앞장서 양보와 화합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권영빈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