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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주도 빅딜은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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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신 빅딜' 로 불리는 시멘트.유화 등 7개 업종 구조조정 추진을 위해 정부와 재계가 31일 어렵사리 자리를 함께 했다.

지난달 29일로 잡았던 회의가 관련 기업들과 협회 등의 반발로 무산된 지 이틀 만에 다시 마련된 자리였다.

정부와 재계는 이날 회의가 끝난 뒤 '자율적인 구조조정' 에 공감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누가, 어떻게, 왜 추진하는지' 를 놓고 이견이 여전한 상황이다.

◇ 업계는 정부 주도 불만=산업자원부 관계자는 "산업의 효율성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과잉 생산 업종의 추가 구조조정이 시급하다" 며 "업종별 단체가 자율 추진하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적극 유도할 것" 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재계 관계자는 "정부가 1999년 반도체 빅딜 때와 같이 인위적으로 업종과 시한을 못박고 추진하려 한다" 며 "산자부의 시도는 한건주의와 공명심의 발로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고 반박했다.

산자부는 신국환(辛國煥)장관이 발벗고 나서 가능한 한 1분기 중 구조조정을 마무리짓겠다며 한차례 무산된 회의를 31일 다시 소집하는 등 추진 의지를 과시하고 있다.

이날 간담회 결과도 당초 산자부가 발표하려 했으나 전경련이 반발함에 따라 조정 끝에 전경련이 발표를 맡는 등 진통을 겪기도 했다.

辛장관은 정부가 빅딜에 개입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이날 모임에 5분 정도의 짧은 연설만 한 뒤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는 99년의 빅딜이 실패작이라는 평가를 감안, 이번 구조조정은 "빅딜이 아니라 효율성을 높이려는 '시너지 딜' " 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 방법이 문제=유화업종을 대표하는 한국석유화학협회측은 "사업부문 통합 논의는 영업 차질, 종업원과 주식시장의 동요 등을 감안해 업체간 비밀리에 협상해야 한다" 며 "정부의 신 빅딜 추진 이후 회사명까지 거론돼 부작용이 크다" 고 주장했다.

현대석유화학의 경우 최근 "국내 유력 업체가 인수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는 정부측의 발언이 전해진 뒤 직원과 거래선이 동요하는 등 부작용이 일어 이를 부인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전기로 철강업계도 형강.철근 등의 공급 과잉을 해소해야 하지만 빅딜보다 법정관리.화의기업들의 처리가 우선이라는 주장이다.

주요 8개 업체 중 한보철강.㈜한보.환영철강이 법정관리, 한국제강은 현재 화의 상태다.

시멘트 업계는 정부가 구조조정 대상에 포함시킨 것 자체가 못마땅하다는 입장이다.

한국양회공업협회 관계자는 "한일.아세아시멘트 등 중대형 업체들이 지난해 사상 최대의 영업실적을 올렸고 설비 가동률도 80%를 웃돌고 있어 2~3년 후면 수급 균형을 맞출 전망" 이라며 "협회에 일언반구도 없이 전통산업이라는 이유로 정부가 구조조정 업종에 포함시켰다" 고 말했다.

이밖에 화섬.면방.제지.농업기계 등도 많은 기업이 워크아웃.화의 상태로 구조조정 외엔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점에는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것에는 반대하고 있다.

◇ 전경련도 미온적=산자부가 '자율 구조조정' 의 주체로 지목하고 있는 전경련과 업종별 단체도 내키지 않는 모습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이번에는 반도체 빅딜 때처럼 전경련이 해당 업체로부터 욕을 얻어먹으면서까지 나서지는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한 협회 관계자도 "업체끼리 먼저 빅딜에 나서지 않는 한 먼저 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지나친 개입은 결국 또다른 실패를 낳을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재범 서강대 교수는 "정부가 구조조정의 가이드 라인만을 정해주고 시장에서 자율로 이뤄지도록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고 말했다.

산업연구원 김용열 연구위원은 "정부가 특정 업종의 빅딜을 지정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며 "전 업종을 대상으로 사업 혁신을 유도하는 방식이 바람직스럽다" 고 말했다.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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