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오비이락 2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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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종교.정치, 그리고 지역감정. 어지간한 사이가 아니면 얘기를 꺼내기 곤란한 우리 사회의 민감성 어젠다들이다.

그런데 조계종 총무원장이 지난 19일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가 집권할 경우 예상되는 '희대의 보복정치' 가능성을 언급한 사건은 이 세가지를 한꺼번에 건드렸다.

종교 지도자가 정치적 발언을, 그것도 매우 편향되게 말한 것은 이례적이다.

이런 돌출발언에 누구나 "왜?" 라는 의문을 갖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이 지역감정이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고향이 어디냐" 고 먼저 묻는다.

스님의 고향은 전북 정읍이다.

호남임을 확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면 그렇지!" 라는 한마디로 나름의 결론을 맺고, 더 이상의 평가나 판단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같은 추론의 근거는 최근까지 조계종 인터넷 홈페이지에 쏟아지고 있는 비난의 글들이다.

평소 수십건의 글이 올라오는 정도로 한산하던 게시판에 불과 며칠 사이 수천건의 글이 몰려 서버를 거의 마비시키고 있다.

내용을 보면 지역감정이 깔린 인신공격성 글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려면 지역감정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개인적 정치성향보다 총무원장이라는 그의 직함에 주목해보자. 총무원장이란 자리가 어떤 자리이고, 현 총무원이 처한 상황이 어떠한가를 이해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판단의 참고자료가 될 것이란 얘기다.

일반적으로 스님들은 이판승(理判僧)과 사판승(事判僧)으로 나뉜다.

이판승은 참선.수도에 전념하는 스님, 사판승은 세속의 업무를 담당하는 스님이다.

총무원장은 사판승 중의 사판승, 조계종 행정업무의 총책임자다.

특히 정대 스님은 1970년대 이후 총무원의 주요 보직을 거쳐온 노련한 사판승이다.

당연히 정치적 발언의 파장을 예측할 능력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무원장이 돌출발언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상생의 정치를 촉구하는 의도" 라는 조계종의 공식해명은 불충분하다.

오히려 오비이락(烏飛梨落)처럼 보이는 최근의 두 가지 일이 총무원이 당면한 상황, 즉 발언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짐작된다.

첫번째 우연은 올해 조계종이 대규모 공사에 착공한다는 점이다.

정대 스님은 지난 11일 신년사업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총무원 청사 건물이 너무 초라해 손님 모시기도 창피하다" 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청사를 새로 짓겠다" 고 밝혔다.

1백50억원 이상이 들어가는 큰 공사이기에 외부 지원이 불가피하다.

두번째 우연은 발언 사흘 전 있었던 판결이다.

정대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한 중앙종회가 '불법' 이라는 불교계 내 반대파의 소송에 대해 법원이 정대 스님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번 주말에는 이와 연관된 또다른 판결, 즉 '정대 스님의 총무원장 자격' 을 부정하는 '부존재확인 청구소송' 의 판결이 나올 예정이다.

이같은 우연들이 발언의 직접적 배경이라고 확신할 근거는 없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이 정략적으로 불교계를 뒤집어놓은 54년 '정화' 사건 이후 불교계가 대체로 여권 편에 서 안정과 발전을 꾀해온 측면이 있다.

총무원장의 발언을 개인적 차원의 지역감정보다 불교와 집권세력의 오랜 협력관계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보고자 하는 이유다.

그 단초가 비록 우연일지라도.

오병상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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