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소송 앞서 진실부터 밝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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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부가 1996년 총선 당시 구(舊)여당에 유입된 안기부 예산 9백40억원을 환수한다며 강삼재(姜三載)의원.김기섭(金己燮) 전 안기부 운영차장과 한나라당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정부가 제1야당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인데다 수사가 진행 중이어서 아직 실체적 진실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시점이란 점에서 소송 배경이 주목거리다.

국가 예산이 특정 정당의 선거자금으로 사용됐다면 환수돼야 한다는 것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안기부 예산을 불법적으로 끌어다 썼다면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고 서둘러 환수 절차를 밟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번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순수한 국고 환수 절차라기보다 정치적 목적을 띤 '야당 목죄기' 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진실 규명이 선명하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한나라당이나 당사자인 강삼재 의원은 안기부 예산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인하는 데다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측이나 일부 여당 의원조차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또 수사 도중에 조사 내용이 여당이나 청와대 쪽에서 흘러나오는가 하면 수사자료로 보이는 의원 리스트가 송두리째 나도는 등 정치적 목적을 띤 수사라는 의심을 받지 않았던가.

특히 총선 자금의 국고 환수는 민주당에서 야당을 공격하며 정치적으로 제기한 문제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도 이를 강조했고 구 여당에서 이적한 어느 민주당 의원은 마치 당장이라도 받은 돈을 반납할 듯 말하기도 했었다.

처음에는 돈 받은 당사자들이 스스로 반납할 것 같은 분위기더니 국고 환수라는 명분이 여론의 지지를 받게 되자 소송이란 극단적인 방법으로 바뀐 것이다.

돈받은 명단이 상당수준 확인됐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두고 당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 타당한지, 구 여당인 신한국당과 한나라당간 법통 문제는 어떻게 될 것인지 두고두고 다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또 예산회계법상의 소멸시효 5년에 쫓겨 서둘러 소송을 냈다는 게 정부측 해명이지만, 소송에 앞서 진실 규명이 선행돼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고 환수가 추진되는 게 제대로 된 순서다.

진실 규명이나 국고 환수가 모두 국가가 해야 할 일인데 진실 규명은 늑장을 부리면서 국고 환수만 서두른다면 이 역시 정치 공세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국가가 수사 중인 내용을 토대로 소송을 낸 것은 전례 없는 일로 정도(正道)가 아니다. 더욱이 사건 내용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제1야당을 상대로 정부가 소송부터 서두른 것은 잘못이다.

1천억원이 넘는 총선 자금에 검찰이 장물취득죄를 적용한 것이나, 국고 환수란 명분으로 정부가 소송부터 시작한 것이나 모두 '비정상' 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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