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 원한 축적의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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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조계종 정대(正大)총무원장은 이회창 총재가 '독한 사람' 이기 때문에 집권하면 정치보복이 벌어질 것이라고 했지만 李총재나 특정 정치인의 성품을 떠나 바로 지금의 우리 정치상황이 앞날의 심각한 정치보복을 걱정하게 만들고 있다.

정치에 있어 지난 3년은 여야간 원한축적의 세월이었다. 여야 쌍방간의 증오나 원한은 지금 깊을대로 깊어졌고, 이런 상태에선 2년 후 겁나는 정치보복이 벌어지거나 그게 아니라도 쌓인 원한을 털어내는 일정한 '통과의례' 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 與가 '독한 사람' 만들어

생각해보면 뻔한 일이다. DJ정권 초부터 야당은 '총풍' 에 터지고 '세풍' 에 혼쭐이 났다.

소속의원을 무려 30여명이나 뺏기고, 원내 제1당이라지만 후원금 등에선 여당의 발 뒤꿈치도 따라갈 수 없었다.

여기에 다시 의원 꿔주기와 안기부 자금파동이 일어났으니 야당의 한(恨)과 증오는 더 깊어졌을 것이다.

지난 주 야당의 창원(昌原)집회에선 "보복엔 보복이 따른다. 피는 피를 부른다" 는 섬뜩한 소리가 나왔고, 사석에선 "당한만큼 해주고 싶은 생각이 왜 들지 않겠나" 고 하는 말도 많다고 한다.

원한은 여야 관계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어떤 야당의원은 "K고 출신이라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직장에서 밀려나자 결심을 하고 야당에 들어갔다" 고 국제회의에 나가서까지 말한 적이 있다.

수사기관에 불려가 혼이 난 사람, 그러다가 이민을 간 사람, 낙하산 인사 때문에 실업자가 된 사람, 부당하게 밀려 나거나 별 볼 일이 없게 된 사람… 등도 숱하게 많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이 바뀌면 '독한 사람' 이 아니더라도 원한을 풀어보자고 저마다 나설 가능성이 없겠는가.

집권측으로서도 이런 현상을 모를 리 없다. 일찍이 한 여당 중진이 "정권재창출을 못하면 피바람이 불 것" 이라고 한 것도 이런 상황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안기부 자금 문제로 여야 극한 대립이 벌어지자 여당 내에선 "이회창이 집권하면 우리 모두 이민가야 한다" 는 말이 나온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임기말이 다가올수록 자기손으로 해코지한 사람의 얼굴이 꿈에 보일까봐 걱정되는 사람은 없을 것인가.

정권을 잡으면 꼭 손봐야겠다는 야당과 정권을 놓으면 피바람이 걱정되는 여당사이에 정치가 제대로 될 리가 만무하다.

정치의 격이니 수준이니 하는 것은 뒷전이고, 저질이나 일구이언(一口二言)도 예사로 알면서 오직 상대를 제압하고 이기는 것만 능사로 아는 정치가 될 것은 뻔한 일이다.

이기고 주도권을 잡는 데 바쁜 나머지 민생이나 국익을 돌볼 틈이 없게 된다.

여야간 원한이 쌓일수록 집권측은 더 방어를 굳세게 할 필요를 느끼고 더 정권재창출에 몰두할 것이고, 집권측이 그러면 그럴수록 야당은 더 원한을 품고 집권의지를 불태울 것은 정한 이치다.

결과적으로 원한이 원한을 부르고, 원한이 정치를 저질화.황폐화시키는 악순환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런 원한의 악순환이 부를 것은 결국 파국뿐이다. 지난날 여야 극한대립이 어떤 결말로 끝났는지는 한두 번도 아니게 우리 모두 역사에서 보았다. 그걸 알면서도 지금 그 길로 줄달음치는 형국이다.

*** 누가 집권하든 평안해야

내일은 설이다. 온국민이 이날 하루 일상을 떠나 조상과 가족과 공동체를 생각해 보는 날이다.

보는 눈이 높다는 어떤 분이 신사년(辛巳年)새해 한국의 운기(運氣)는 매우 좋다고 하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전에 탄허(呑虛)스님도 21세기 초 한국에 대운(大運)이 온다는 예언을 한 적이 있다기에 왠지 새해에 기대를 거는 심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정치판에 쌓여가는 원한과 증오, 과거를 뒤져 보복과 단죄를 되풀이할 가능성을 생각하면 대운은 무슨 대운 하는 낙담하는 심정이 되고 만다.

여당은 임기 중에 모질게 하면 할수록 임기 후가 더 두려워지게 되고, 야당은 원한을 품을수록 상대가 더 정권을 놓지 않으려 할 것이란 생각을 왜 좀 못할까. 부시가 클린턴의 잘못을 거론하지 않겠다고 하는 미국정치가 부럽다.

아무리 하늘의 운세가 좋아도 그걸 받아들이고 성사시키는 것은 사람에게 달렸다. 정치지도자의 탐욕때문에 우리의 21세기가 벽두부터 막혀서야 되겠는가.

다들 설 연휴에 정국구상을 한다니 원한 해소방안부터 구상해보기를 주문하고 싶다.

송진혁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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