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명성황후' 영국·일본 무대서 명성 드높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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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한국의 뮤지컬 ‘명성황후’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황금빛 같은 조명과 기발한 무대 세트,화려한 의상으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특히 마지막 노래 ‘백성이여 일어나라’에서는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나 인터내셔널가와 같은 스펙터클함이 느껴졌다”.<1997년 8월21일자 뉴욕타임스>

*** 97년 8월21일 새벽 뉴욕

명성황후를 극찬한 기사를 담은 뉴욕타임스가 한창 인쇄되고 있을 무렵. 공연후 무대 뒷정리,자정 무렵의 저녁을 마치고 맨해튼 브로드웨이 한 작은 호텔에 도착한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침대에 몸을 뉘었다.

공연보다 이국땅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는 일이 더 힘들다.낮에는 거리에서 포스터 붙이랴,한인교회 ·슈퍼마켓을 돌며 홍보전단 돌리랴,눈코 뜰새 없이 시간을 보냈다. 대형 빌딩 앞에서 열리는 열린음악회에 뛰어들어 “노래를 불러줄테니 공연 포스터 한장 벽에 붙이게 해달라”며 사정도 했다.

서울에서 이렇게 하라면 아마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게다.그래도 미국으로 떠나기 며칠전 “스폰서가 없어 너무 어렵다.

그렇지만 간다.비행기를 못타면 배를 타고라도 간다”는 윤호진 대표의 비장한 각오를 들었을 때 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하다.땀흘려 준비한 보람도 없이 무너질 수 없다는 생각에 “출연료 없이라도 뉴욕엔 가자”고 서로 눈물을 흘리며 다짐한 터였다.

윤대표와 스탭들은 방에 앉아 지난 하루를 평가하고 있다. 재미 아티스트 백남준씨를 비롯해 기업체 간부들,현지 교민들, 모두 좋았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래도 자신이 없었다.게다가 높은 환율차이로 공연을 할수록 불어날 빚 생각만 하면 답답해졌다.바로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대표와 평소 알고 지내던 언론사 뉴욕특파원이다.

“윤형,지금 인터넷에 보니까 뉴욕타임스 공연평이 실렸는데,훌륭해.이걸로는 기사 크기를 모르겠으니 가판신문을 한번 사보라구.”

뉴욕공연의 성공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었다.가판대에 신문이 나오기 전이라 컴퓨터로 뉴욕타임스 홈페이지에 들어갔다.애니타 게이츠 기자의 공연평.기대 이상이었다.기사를 여러장 프린트해 “영어 좀 한다”는 단원들이 모여앉아 한줄씩 읽어내려갔다.읽고 또 읽고.

다음날 뉴욕 스테이트극장 링컨센터에는 관객들이 몰려 예상치 못한 입석표를 판매해야 했다.

“입석표 판매”라고 써붙인 매표소 입구에서 기념촬영도 했다.

*** 거슬러 올라 91년 3월 서울

서울 방배동의(주)한샘사옥.윤호진씨가 뮤지컬 전문극단을 설립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다.윤씨를 돕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서울공대 연극과 출신 기업인들.

우선 척박한 국내 토양을 감안해 ‘운영위원제도’를 만들어 주주자격으로 극단운영에 참여키로 했다.주위에서는 “돈 있으면 잘 살 궁리나 하지,왜 저런 짓을 할까”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극의 구성만 탄탄하면 얼마든지 세계에서 경쟁할 수 있다.브로드웨이에 가져갈 창작 뮤지컬을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윤씨를 믿기로 했다.윤씨는 95년 명성황후 시해 1백주년을 맞아 시해사건을 뮤지컬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조심스레 꺼낸다.

*** 92년 12월 런던 웨스트우드

윤대표와 소설가 이문열씨가 나란히 런던 웨스트엔드 밤거리를 걷고 있다.동갑내기로 평소 호형호제하는 두 사람이 이곳에 온 이유는 표면상 ‘뮤지컬 공부’다.

요즘 어떤 작품이 뜨는지,흥행의 성공비결은 뭔지.‘캐츠’‘미스 사이공’등 유명하다는 작품은 모조리 다 훑었다.어떤 날은 하루종일 술집에서 술을 먹기도,또 어떤 날은 하루종일 템즈강변을 걷기도 했다.

“이형,어때.뮤지컬이라는게 생각했던것 보다 감동적이지? 사실 저런 작품 소재들도 처음엔 별거 아니었어.명성황후도 이형이 쓰면 세계적인 작품으로 만들 수 있을거야.”

이문열씨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다.윤대표는 뮤지컬 소재를 명성황후로 정하고 곧바로 이문열씨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평소 “끝내주는 작품 하나 써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였다.

하지만 영남의 남인집안에서 자란 이문열씨는 민비를 “가문의 적”쯤으로 생각했기에 완강히 거부했다.

윤대표가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영국 뮤지컬 여행이다.그래도 대답을 않던 이문열씨가 마음을 돌린 것은 94년.

명성황후 숭모회 사람들과 만난뒤였다.이씨는 당시 외국선교사들의 기록 등을 토대로 명성황후를 ‘조선의 잔 다르크’로 만들어냈다.

*** 95년 10월8일…비장한 결정

명성황후 시해 1백주년에 맞춰 일찌감치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대관을 해두었다.하지만 욕심만 앞서간 기획이었다.

수십억이 필요한데 후원사가 나서질 않았다.대관날짜를 연기했다.윤대표는 마지막 카드로 삼성나이세스측에 “작품을 무대에 올리게만 해 준다면 판권을 주겠다”는 글을 보냈다.

“무대에만 올려주면 모든 것을 주겠다”는 비장한 심경.아무 응답이 없었다.그렇다고 ‘시해 1백주년’을 넘길 수는 없다.

예술의전당에 무조건 달려갔다.사장도 만나고 국장들도 만났다.“공연 끝나자마자 대관료는 일시에 지불하겠다.무대에만 올려달라”고 통사정했다.

95년 12월 30일…첫공연

첫 공연.당초 30억원으로 책정한 제작비는 절반에도 못미치는 12억으로 깍아야했다.포스터에 인쇄까지 했던 모스크바교향악단과 의상 윌라 킴,안무 국수호의 이름은 사라지고 대신 국내 연주자들과 김현숙·서병구의 이름이 새겨졌다.

결과는 기대이상이었다. 기립박수를 치는 관객들, 축하한다며 악수를 청하는 친구들까지.하지만 ‘올해안에 무대에 올렸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감격할 겨를도 없었다.

96년 1월14일까지 열린 첫 공연의 유료객석 점유율은 58%.순조로운 출발을 보인 ‘명성황후’의 유료객석점유율은 뉴욕과 LA 공연 후 가파르게 상승해 98년 69%,지난해 3월에는 73%의 높은 점유율을 기록했다.

*** 2001년 1월12일 서울

8번째 국내공연이 열리고 있는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11일 현재 총 3백5회 공연에 40여만명의 관객이 다녀갔다. 덕분에 ‘국민뮤지컬’ 이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이제 ‘명성황후’는 세계로 향한다. 에이콤은 그간 해외공연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된 영어자막문제 해소를 위해 최근 영어버전을 완성했다. 영어버전에 이어 일본어 버전을 완성하고 영국과 일본 동시진출을 구상하고 있다.

윤대표는 늦어도 올 연말쯤에는 런던과 도쿄 무대에 ‘명성황후’를 올리겠다는 각오다.

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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