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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 산책

“내가 앉은 자리가 꽃자리가 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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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저는 새벽 공기를 마시며 고요하고 평화로운 호흡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죠. 마음의 기도를 올리면서 말입니다. “이 세상 모두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간절히 기도하죠. 그러고는 아는 사람의 얼굴을 한 분씩 떠올립니다. 그분들의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함께 기원해 드리면서 말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저를 위한 기도는 따로 하지 않죠. 그런데 기도를 할수록 묘한 일이 벌어집니다. 제 삶이 더 고요하고 평화로워질 뿐 아니라, 새로운 변화의 계기도 일어나더군요.

요즘, 제 차 트렁크를 보는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묻습니다. “어머, 이게 다 뭐예요?” 지난달에 한방건강TV를 그만두면서 사무실에서 쓰던 짐들을 가득 실어놨거든요. 어디에 둬야 할지 여기저기 생각해보다가 마땅치 않아서 그냥 차에 싣고 다니고 있죠. 일반적으로 제자리를 찾지 못한 물건이나 상황은 불안정하고 불편합니다. 물건뿐만이 아니죠. 이 세상 모든 생명과 사람, 마음과 관계 등이 그 ‘있어야 할 자리’를 찾지 못하면 불편하고 불안한 게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서 있는 자리는 어떻습니까? 사람이든 물건이든 ‘있어야 할 자리’에서는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평화롭죠.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유롭습니다. 또 있어야 할 자리에서는 은혜롭고 아름답죠. 제자리를 지키는 등대가 있어 밤배들이 순항할 수 있고, 철 따라 제자리를 지켜주는 꽃과 나무가 있기에 산이 아름다울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림=김회룡 기자]

얼마 전 잠실역 화장실에서 주인을 잃은 휴대전화를 발견했습니다. ‘다시 찾으러 올 수 있으니까 그냥 둘까?’ ‘아니야, 잃어버린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너무 멀리 있을지도 몰라?’ 순간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왔죠. 통화 기록을 확인하고 연결 버튼을 눌렀습니다. 놀이공원에 놀러 갔던 딸아이의 어머니라며 전화를 받으시더군요. 마침 일행이 분당 가는 길이라 휴대전화는 곧 주인을 만났습니다. 주인을 찾아가는 휴대전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는 지금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는가?”

지금 트렁크에 실려 있는 저 짐들은 언제 그 ‘있어야 할 자리’를 찾게 될까요? 얼핏 보면 제자리가 아닌 듯한 이 짐들을 보며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저는 잦은 인사이동을 했습니다. 제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이동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옮긴 경우도 많았죠. 그러면서 어느 날 문득 삶이란 ‘환상을 깨는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옮길 때마다 어떤 환상을 갖고 출발하지만, 실제로 가보면 여지없이 예상 밖의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제는 압니다. 결국 어떤 곳을 가더라도 문제 없는 곳이 없고, 애로 없는 곳이 없다는 것을 말이죠. 또 한편으로 삶은 ‘끝없는 여행’입니다. 아무리 그 자리에 안착하려 해도 계속해서 떠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때가 되면 우리 안의 욕구가 꿈틀대고, 밖의 상황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저 트렁크 속의 짐들도 언젠가는 어디엔가 자리를 잡겠지만, 때가 되면 또다시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떠나게 됩니다. 끝나지 않을 여정인 거죠.

그렇다면 정말 우리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요? 쉽게 답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곳은 내가 원하는 자리, 내게 주어진 자리가 되겠죠. 말하자면 ‘나만의 맞춤자리’인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어떤 자리’에 대한 환상을 좇는 경향이 있죠.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 자리를 향해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죠. 성공과 부와 명예를 보장해줄 거라 믿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고 눈치를 보게 되는 거죠.

정작 우리가 ‘있어야 할 그 자리’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죠. 어떤 식의 삶의 방식도 택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 보이는 자리라 하더라도 근원적인 평화와 행복과 맞닿아 있지 않다면 언제든 흔들리게 됩니다. 사실은 ‘있어야 할 자리’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집착만 내려놓는다면 거기가 어디든 ‘지금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우리의 환상과 기대를 놓고 온전한 본성에 입각한 자리, 진리에 입각한 자리, 생명 평화와 맞닿아 있는 자리라면 그 자리가 어디든 바로 꽃자리인 거죠. 그렇게 보면, 막상 제 트렁크의 짐들도 있어야 할 자리에 제대로 실려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그 앉은 자리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최선일까요? 그건 아니죠. 때가 되면 옮겨가야죠. 그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우연처럼 운명처럼’ 새로운 자리가 열리게 됩니다. 그때는 또다시 바람처럼 자유롭게 가뿐하게 떠나야죠.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건 바로 이런 때죠.

혹시 지금 자리 때문에 고민하고 계신가요? 남의 자리가 더 좋아 보여서 엉덩이를 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비교하거나 좌절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조금만 더 연봉이 높다면, 조금만 더 좋은 학교를 나왔더라면 하면서 말이죠.

남의 자리를 기웃거리거나 지금 자리에 집착하면 고통이 시작됩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행복하면서도 있어야 할 자리로 이동하는 일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수행도 삶도 결국 머무름이 없는 여행입니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있어야 할 자리로 끊임없이 떠나는 여행 말이죠. 결국 이 여행에서는 있는 그 자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되고, 있어야 할 자리는 지금 있는 이 자리와 맞닿아 있죠. 이렇게 있어야 할 자리에서 평화롭고 행복하려면 마음도 열려 있어야 하고, 행동도 따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아침 기도합니다. “오늘도 이 세상 모든 생명이, 마음이, 관계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지금 있는 그 자리가 꽃자리가 되시라고. 바람이 불면 또 새로운 꽃자리를 찾아, 그 있어야 할 자리를 찾기 위해 오늘도 한 걸음 내던지라고 말이죠.

김은종 (법명 준영) 원불교 교무·청개구리선방
그림=김회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