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동화작가 고 정채봉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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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믿음을 나도 믿는데, 나의 이 신앙은 동심" 이라며 험한 세상을 밝힌 동심의 등대지기, 동화작가 정채봉씨가 9일 타계했다.

다섯살배기 떠돌이 고아가 폭설 속에 암자에 갇혀 지내다 맑고 깨끗한 동심으로 부처가 되었다는 그의 동화 '오세암' 처럼 눈이 내려 쌓이며 또 내리는 날 어른들 마음 속 하얀 동심의 화석이 됐다.

"아동문학의 큰 손실입니다. 고향과 대학 후배로서 고인은 활짝 웃는 해맑은 웃음만으로도 구원이 됐는데, 이제 어른이 된 우리 마음 속 동심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습니다."

부음 소식을 듣자마자 뛰어와 빈소를 하루종일 지킨 소설가 조정래씨는 "최소 10년간이라도 그가 더 작품 활동을 펼치기 바랬다" 며 아동문학 중흥뿐 아니라 문학의 폭을 넓힌 후배를 아쉬워했다.

전남 승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동국대 국문과를 나와 1973년 '꽃다발' 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당선한 뒤 본격적으로 동화 창작에 뛰어들었다.

가난한 바닷가에서 태어나자마자 그는 스무살 꽃다운 나이의 어머니와 사별했다. 이내 아버지마저 일본으로 이주하자 그는 할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우두커니 바다만 바라보며 수평선 위를 나는 새, 별빛과 밤배를 바라다 보는 동심이 그의 문학세계였다.

특히 '멀리 가는 향기' '내 가슴 속 램프' 등 깊은 울림이 있는 줄거리와 시적인 문체로 어른들도 동화 속으로 푹 빠지게 해 '성인동화' 를 개척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20여권의 동화와 에세이.시집 등을 통해 수십만명의 성인 독자를 사로잡았던 그는 98년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간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해맑은 동심이 병마도 퇴치하리라는 믿음으로 투병한 그는 퇴원해 2년 가까이 활발히 작품 활동을 펼치다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 세상 다녀가는 사람치고 슬픔이 없었던 사람 없어. 우리 바다는 원래 세상 사람들의 눈물로 이뤄진 거야" 라며 퇴원 후 고향 바닷가를 찾아 우리의 아픈 마음만 위로해 주고 정작 그는 동심의 바다에 묻힌 것이다.

78년 월간 '샘터' 의 편집기자로 입사해 23년간 이 잡지를 순수 대중 교양잡지로 키워온 고인은 대한민국 문학상.새싹 문학상.세종아동문학상.소천아동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날 빈소에는 시인 김남조.정호승씨, 소설가 최인호.정찬주씨, 가수 노영심씨 등이 눈길을 뚫고 속속 찾아와 고인을 애도했다.

김성구 샘터사 사장은 "지식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순수 교양을 퍼뜨린 그의 타계로 우리 삶의 향기가 시들까 걱정된다" 며 슬퍼했다. 발인은 11일 오전 5시. 2224-7351.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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