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정치권 이성을 되찾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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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치판이 갈수록 살벌해지고 있다.

검찰수사가 구여권과 야당쪽을 옥죄는 와중에 청와대와 여당은 연일 서슬퍼런 대야(對野)공세를 펼치고, 야당은 사생결단의 각오로 맞서고 있다.

검찰수사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여야 대결의 끝이 있을지 현재로선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경제위기를 풀어보자는 생산적 고민은 어디론가 종적을 감췄고 대신 정치소음만 가득하니 그걸 지켜보는 국민만 불쌍하게 됐다.

작금의 정치판은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주고받는 언사에서 품위를 찾아볼 수 없고 동원되는 논리도 아전인수(我田引水)식 '네 탓' 타령뿐이다.

"대통령에게 '작태.짓' 이라니" 등 말꼬리잡기가 등장하고, 생일축하 난을 받았느니, 문전박대했느니, 유치한 논쟁까지 벌어지고 있다. 묵은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면서 적개심이 가득하다.

검찰수사가 발표되지 않았는데도 여당 대표는 연일 야당 총재를 향해 "관련이 있을 것" 이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야당 대변인은 "DJP정권은 생식능력이 없는 노새정권" 이라고 원색적으로 쏘아붙인다. 이성잃은 시정배들의 싸움판을 보는 것 같다.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진흙탕 싸움의 한복판에 3金이 자리잡고 있고, 3金정치의 구태가 되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역정치.1인 보스정치.대결정치 등 구태 정치의 표본이 극복되기는커녕 건재한 모습으로 부활하고 있으니 새 정치의 기대는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

3金1李가 뒤얽혀 있는 싸움판 밑바닥엔 조기 권력누수를 막겠다는 정권안보와 차기 대권경쟁이 자리잡고 있어 양상이 그만큼 복잡하다고 본다.

그러나 정치권이 이같은 정치놀음으로 시간을 허송할 여유가 우리에겐 없다. 세계 각국은 이미 21세기를 주도하겠다는 야심으로 저만치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정보화시대는 시각을 다툰다. 지금처럼 늑장부리다간 또다시 시대의 낙오자가 될 것이다.

내부 싸움만 벌이고 있을 계제가 아니다. 정치권이 하루빨리 이성을 되찾지 않으면 후대에 두고두고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다.

경제위기 해소는 발등의 불이다. 이것을 해소하는 일부터 여야가 지혜를 모아야 한다. 온 국민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우선 여야가 힘을 합쳐야 할 때다.

우리는 지난 연말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틀어진 민심의 소재를 절감하고 경제실정에 대해 반성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또한 이회창(李會昌)총재가 무조건 등원 때부터 보여준 유연성과 '초당적 협력' 을 다짐하던 모습도 기억한다.

바로 거기에 상생의 해법이 있다고 믿는다. 金대통령의 '반성' 과 李총재의 '초당적 협력' 언저리에서 함께 엮어가는 정국운영의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밑도 끝도 없는 정쟁을 잠시 중단하고 냉정을 되찾아 무엇이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살리는 길인지 고민하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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