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김대통령의 현실 인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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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어제 의원 이적(移籍)문제에 대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불가피한 일" 이라고 언급했다.

金대통령이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비판 여론과는 동떨어진 시각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향후 정치상황에 상당한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정초를 맞아 희망의 정치를 갈구하는 국민에게 치졸한 속임수 정치를 선보인 데 대한 사과가 있을 법했으나 그와는 정반대 모습이기 때문이다.

金대통령의 현실 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과 함께, 金대통령이 밝힌 '강한 정부' 가 뭔가 잘못된 인식을 바탕으로 밀어붙이기식 국정 운영을 하겠다는 의미는 아닌지 우려를 갖게 한다.

金대통령은 "정치 불안이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며 "국민의 정부 출범 이래 원내 소수를 벗어나지 못해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합법적인 방법을 막고 협력을 거부하는 야당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고 말했다. 경제 위기는 정치 불안에서 비롯됐고, 정치 불안은 여소야대(與小野大)구조와 야당의 비협조 탓이라는 설명이다.

金대통령은 또 총선 민의는 여야 모두에 과반수를 주지 않고 자민련에 캐스팅 보트를 준 것이라는 논리로 '현실적 존재' 인 자민련이 교섭단체가 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자민련과의 공조는 대선 공약으로 당연하다고 역설했다.

이미 우리가 여러차례 언급했지만 정치 불안의 본질적 책임은 집권 여당의 정치력 부재에 있다고 본다.

야당의 잘못이 없지는 않겠지만 대통령으로선 야당과 여론을 설득하지 못한 집권당의 역량 부족과 안이한 대처에 대한 반성부터 하는 게 순서에 맞다.

총선에서 자민련이 교섭단체에 미달한 것도 제1 야당을 국정 파트너로 해 타협의 수준 높은 정치를 하라는 명령이라고 봐야 한다.

대화와 타협을 포기한 채 세력을 부풀려 힘으로 밀어붙이겠다는 발상이야말로 총선 민의를 배반하는 행위다. 바로 그러한 발상에서 대결의 상극정치가 비롯된 것이다.

경제 위기가 정치 불안에서 왔다면 정치 불안의 핵심은 민주적 절차와 원칙을 지키지 않는 집권당의 머릿수 정치 때문이라는 게 더 정확한 진단일 것이다.

金대통령은 청와대 시무식에서 '민주적인 절차와 과정' 및 '원칙' 을 강조했다. 의원 이적 파동이 과연 민주적 절차와 원칙을 지킨 '불가피한 선택' 이었는가.

작금의 위기 상황은 측근 중심의 사당 정치, 비판을 귀담아 듣지 않는 독선적 분위기, 의원 이적과 같은 구태 정치,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걸 몰랐다고 둘러대는 속임수 정치에서 비롯됐다는 게 일반적인 판단이다.

이제 金대통령은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와의 여야 영수회담을 앞두고 있다. 그 자리가 생산적인 상생의 대화의 장이 되기 위해서도 의원 이적 파동에 대한 납득할 수 있는 조치가 선행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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