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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우리에게 무엇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오늘날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근본적인 힘은 자본주의와 기술문명이다.

자본을 가진 사람이 기술자들을 고용하고, 그 기술자들은 전에 없던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 그 제품은 천박한 대중문화가 동원돼 유포되고, 그런 유포를 통해 자본이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이야말로 오늘날의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기본적인 욕망의 고리다.

이제 자본과 기술의 힘은 기계를 만들어내는 수준을 넘어 인간 자체를 분해하고 조작하고 상품화하고 유통시키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신체가 유전자 수준에서 조작되는 단계에 이르렀으며, 가상 현실을 통한 현실의 파편화와 조작은 대중을 몽환적 상태로 이끌어가고 있다.

***자본.기술의 힘 더 세질수도

이런 자본과 기술의 눈먼 욕망이 억압적인 권력과 결탁할 경우 그 결과는 그 누구도 예측키 힘들다. 오늘날 이뤄지고 있는 거대한 변혁은 인류에게 자칫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비극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21세기에도 억압적인 권력의 잔재는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자본과 기술의 강력한 힘은 더욱 더 우리 삶을 옥죌는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 맞설 수 있는 일차적인 힘은 의식 있는 사람들의 광범위한 연대와 집요한 저항이지만, 더 근본적인 힘은 대중에게 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뛰어난 예술가, 국위를 선양하는 운동선수, 위대한 사상가가 아니다. 정말 소중한 것은 우리 사회의 대중 전체의 의식수준과 교양이 조금만이라도 높아지는 것이다.

미래의 진정한 행복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과나 몇명 인물들의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 있는 대중을 길러낼 수 있는 교육적.문화적 저력에 있을 것이다.

많은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쌓인 교육적.문화적 저력이 깨어 있는 대중들을 길러내고, 그 대중들이 모순된 현실에 맞설 때에만 우리 미래에는 희망이 존재한다.

새로운 한해가 다시 찾아왔다. 본격적으로 열린 21세기를 희망이 있는 세기로 만들어야 할 무거운 짐과 함께 말이다.

지난 세기는 우리네 삶이 거대한 변화를 겪었던 시대였고, 그 변화의 와중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아픔의 시대였다.

지난 1백년의 세월 동안, 그 이전 5백년간 지속됐던 조선시대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지난 세기의 방황과 아픔을 치유하고 희망이 있는 세상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서구가 아닌 다른 모든 지역들이 그렇듯 우리의 현대사 역시 제국주의와 더불어 개막됐다. 그리고 출발점에서의 그런 비극은 우리 삶 구석구석에서 아직도 거대한 힘을 가하고 있다.

우리의 모든 문화는 여전히 서구와 일본에 경도돼 있다. 이런 비극의 책임은 그렇게 경도된 대중들에게 있다기보다 그런 문화들에 어깨를 나란히 할 문화를 창출해내지 못하는 지식인들에게 있다.

늘 남의 것을 베끼기나 하고 흉내내기나 해온 과거의 그릇된 체질은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21세기 우리들은 지난 1백년간 우리에게 흘러들어온 수많은 지적.문화적.제도적 자산들을 우리 안에 용해시키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재창조해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21세기를 창조적 종합의 세기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영웅보다 의식있는 시민 필요

우리 문화에 가득찬 파시즘의 잔재도 새 세기에는 떨어내야 한다. 30년간 지속돼 온 군사정권이 남긴 경직성과 폭력은 아직도 우리 삶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파시즘 문화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민의 자각이 중요하다. 시민이 향락적인 소비문화나 환락적인 대중문화에서 벗어나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려면, 또 부정부패 없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하려면, 사회 곳곳에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는 사회단체.교육단체들이 헌신적인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희망의 세기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이정우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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