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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식인 지도] 촘스키가 걸어온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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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촘스키는 자신의 천재성을 인류의 밝은 삶을 위한 투쟁의 도구로 활용하는 행동파 지성이다.

우선 그의 경력은 화려하다 못해 눈부실 정도다.

29세에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부교수, 32세에 정교수, 37세에 석좌교수, 47세에 아주 드문 경우지만 그 자신이 하나의 독립된 학문기관과 상응하는 '인스티튜트 프로페서' …. 그는 주 전공인 언어학뿐만 아니라 정치학.철학.인지과학.심리학 등 다방면에서 70여권의 저서와 1천여편의 논문을 발표한 정력적인 학자다.

일찍이 미국의 유력지인 시카고 트리뷴은 촘스키를 인류 역사상 가장 자주 인용되는 여덟번째 인물로 묘사했고, 뉴욕 타임스는 그를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 이라 불렀다.

1980년부터 92년 사이 인문.예술분야 인용지수(AHCI)에서 4천회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인용지수(SCI)에서도 74년부터 92년 사이 1천6백여회나 인용됐다.

이런 통계는 촘스키가 인문학뿐만 아니라 과학분야에서도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촘스키는 28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유대계 러시아인 이민 2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뉴욕 타임스의 부음란에 소개될 만큼 내로라 하는 히브리어 학자였다. 언어학자로서 그의 삶의 원천은 아버지였다.

유년 시절 그는 미국의 교육사상가인 존 듀이의 교육방침을 따르는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오크 레인 컨트리 데이 초등학교에서 창조적인 사고를 키웠다.

이런 교육전통에 영향을 받아 "교육은 학생들의 지적 호기심을 고양시키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고 주장한다.

촘스키는 50년대 아내와 함께 이스라엘의 키부츠에서 공동체 생활을 경험한다. 여기서 자유주의 정신을 체득한 그는 점차 현실문제에도 눈을 뜬다.

특히 사회주의자가 많았던 외가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게 분명한 그의 비판정신은 60년대 들어 본격 폭발한다.

베트남 전쟁 등 사회적 이슈들이 분출하던 당시 그는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 반대운동의 전초에 섰다.

66년 뉴욕 타임스의 기고문은 촘스키를 비판적 지식인으로 각인시킨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는 '지식인의 책무' 란 제목의 글에서 "지식인은 정부의 거짓말을 세상에 알려야 하며, 정부의 명분과 동기 이면에 감추어진 의도를 파악하고 비판해야 한다" 고 역설했다.

이후 뉴욕 타임스 등 미국의 주류 언론들은 그를 기피인물로 외면했다. 그는 67년 국방부.법무부 앞의 반전 데모에 참가했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90년대 들어서도 그는 비판의 강도를 낮추지 않았다. 걸프전과 코소보.동티모르 등에서의 인권유린을 고발하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는 한편, 신자유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비판의 고삐도 늦추지 않고 있다.

MIT의 제자그룹과 주도한 'Z-매거진' 은 촘스키 사상의 진원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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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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