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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새해특집] 신화 속의 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4면

서기 2000년이 세 번째 밀레니엄의 첫 해라고 호들갑 많이들 떨어대었다.

장사꾼들 농간이었지 싶다. 1900년에 세상 떠난 니체를 두고, '20세기를 보지 못했다' 고 하던 유럽인들까지도 호들갑을 떨었었다.

호들갑을 떨지 않았으니 나는 2001년을 새 밀레니엄의 첫 해로, 새 세기의 첫해로 느긋하게 자축할 자격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2001년이 신사년(辛巳年) '뱀해' 라는 것을 알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신화학도인 만큼 까닭을 신화로 말해 보겠지만 뱀이 너무 길 듯이 뱀 이야기도 길어질 것 같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 아폴론은 왕뱀 퓌톤을 죽인 것으로 유명하다. 뱀 죽이는 것이 무슨 유행이었던지, 테바이 국조(國祖) 카드모스도 뱀을 죽인다.

헤라클레스는 한술 더 떠 태어난 지 아흐레 만에 허벅지만한 뱀을 두 마리나 죽이고, 장성해서는 머리 아홉 개 달린 물뱀 휘드라를 죽인다.

이아손도 보물을 지키던 거대한 뱀을 죽이고 보물 '금양모피(金羊毛皮)' 를 손?넣는다.

이 시절의 뱀은 인류의 무의식에 각인된 파충류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 심리적 '어둠' 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 어둠이 태양신 손에 죽었다.

그런데 태양신 아폴론이 이상한 짓을 한다. 그가 왕뱀 퓌톤을 죽인 곳은 '델포이' 다.

'자궁' 이라는 뜻이다. 그가 짓게 한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는 '옴팔로스' 라는 이름의 돌덩어리가 있다. '배꼽' 이라는 뜻이다.

델포이가 세계의 자궁이자 배꼽, 세계의 '중심' 이 된 것이다.

이 때부터 그리스 미술에는 '나무 감고 오르는 뱀' 이 자주 등장한다. 나무는 '세계수(世界樹)' , 뱀은 '세계사(世界蛇)' , 나무가 선 자리는 세계의 중심을 상징한다.

세계사는 헤라클레스.이아손.알렉산드로스 대왕 등 이름난 영웅 옆에 자주 그려진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담과 이브' 에도 아담과 이브 사이에 세계수가 그려져 있다. 문제의 뱀은 그 나무를 감고 오른다.

그런데 세월이 더 흐르자 땅속 드나들기를 자유자재로 하는 것에서 착안했는지 뱀은 지하로의 하강과 지상으로의 상승을 상징하는 영물(靈物)이 된다.

천상천하 오르내리기가 자유자재인 전령신(傳令神)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타고 오르는 뱀이 바로 이 뱀이다.

태양신 아폴론이 또 이상한 짓을 한다. 왕뱀 퓌톤의 아내(암뱀) 퓌티아를 사람으로 변신시켜 자기 신전 예언자로 데려다 앉힌다.

왕뱀이 죽은 자리, 세계의 중심과 상승과 하강을 상징하는 지점이 이번에는 예언의 자리가 된다. 뱀은 예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스 최초의 예언자 멜람포스는 뱀이 귀를 핥아준 덕분에 점쟁이가 되고 최고의 점쟁이 테이레시아스는 지팡이로 뱀을 때려 죽인 것을 계기로 예언자가 된다.

이로써 그 자리는 태양과 어둠, 삶과 죽음, 지상과 저승, 앎과 모름이 엇갈리는 세계의 복잡한 중심이 된다.

중심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뱀에 대한 관찰이 계속되었던 모양인가?

허물벗고 거듭나는 것을 보고 착안했는지 이번에는 의신(醫神) 아스클레피오스의 사자(使者)가 된다.

의신전에 우글거리던 흙빛 무독사(無毒蛇)가 핥아주면 천하에 없는 병도 깨끗이 나았단다. 오늘날 육군 군의관 휘장에 그려지는 뱀이 이 뱀이다. 의성(醫聖) 히포크라테스가 바로 의신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가장 유력했던 종교의 하나인 자이나 교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돌고도는 시간을 바퀴로 상징해낸다.

자이나교 시간은 '칼라카크라' , 즉 '시간의 바퀴' 다. 영원히 순환하는 시간의 바퀴에는 두 개의 바퀴살이 있다.

그들은 시간이 '최선의 때' 에서 '최악의 때' 를 거듭해서 순환한다고 믿는다.

최선에서 최악으로 흐르는 것이 '아바 사르피니' , 최악에서 최선으로 흐르는 것이 '우트 사르피니' 인 것이다.

'사르피니(sarpini)' 가 무엇인가? '뱀(serpent)' 이다.

그들이 '시간의 바퀴' 를 그린, 구불텅거리는 거대한 뱀은 상승과 하강을 상징한다.

2001년 신사년 뱀해의 뱀은 아바 사르피니인가, 우트 사르피니인가? 이러니 시간 다스릴 재간이 없는 내가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이윤기(소설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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