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민 기만한 여야 예산심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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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새해 예산은 여야가 합작으로 만든 국민 기만극 같다.

정부 원안 1백1조3백억원에서 8천54억원을 삭감해 1993년 이래 최대 삭감률을 기록했다고 선전하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사실상 증액이라는 해괴한 결과다.

여기에 여야가 각기 텃밭인 영.호남 지역사업을 두둑이 챙겼다. 국민 혈세의 나눠먹기식 예산 심의라는 비판을 면할 길 없다.

여야는 이번에 총 2조6천여억원을 삭감하고 1조8천여억원을 증액했다.

그러나 삭감 항목 중 대부분이 예비비와 국채 이자.금융 구조조정 이자로 차후 추경예산에 반영될 것이 뻔하다는 게 예산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 액수가 총 1조8천여억원으로 이를 확정된 예산 1백조2천억원에 포함시킬 경우 정부 원안보다 오히려 1조원 가량 늘어난다는 계산이 된다.

실제로 여야 예산 심의 실무 관계자들까지 "예비비 등은 삭감 액수 이상의 추경 소요가 불가피할 전망" 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고도 국민에겐 '8천억원 삭감' 이라고 선전하고 있으니 '눈가리고 아웅' 격이요, 국민을 향한 사기극이 아니고 무엇인가.

예비비 항목에서 자연재해 등 국가 긴급상황 발생시 사용하는 목적성 예비비를 8천억원이나 삭감한 것은 전례없는 일이다.

여야 예산 관계자들은 정부의 예비비 항목이 과다 편성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산불.홍수 등 재해발생시 곧바로 추경예산을 심의할 수 있도록 여야가 합의해 신속한 집행에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올해에도 각종 재해대책을 이유로 추경예산을 짰던 경험을 돌이켜보면 올 예비비보다 대폭 줄어든 액수로 과연 제때에 효과적인 재난대책이 이뤄질 수 있을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사회간접자본(SOC) 관련 투자가 대폭 증액된 것은 내년도 경제여건을 고려한 조치로 평가되긴 하나 사업마다 부산.대구.목포.광양 등 영호남 일색이니 여야 담합의 결과란 비판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예산 심의.의결은 입법권.국정통제권과 함께 국회가 헌법과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중요 권한이자 책무다.

이를 소홀히 하고 국민 속임수까지 선보였으니 국회가 제 기능을 포기한 것과 다름없다.

그에 따른 여야 지도부의 책임이 막중하며 그 중에서도 야당쪽 책임이 더 크다. 여당이란 예산안을 편성.제출한 행정부 쪽을 옹호하는 게 지금까지의 관례다. 야당은 이회창(李會昌)총재가 당초 10조원 삭감을 표방하다 8조원.6조원.3조원으로, 다시 1조원으로 삭감 목표가 줄어들더니 마침내 8천억원으로 낙착됐다.

그 과정에서 한번도 왜 당초 목표가 달라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그렇게 목청을 높이던 남북협력기금과 국정원 예산도 단 한푼 깎지 않은 채 넘어갔다. 한나라당은 국민기만적 삭감 쇼에 대해 해명.사과하고 지도부는 책임을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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