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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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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 지난 10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국군관현악단 창단연주회가 열렸다.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시작으로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 1악장과 교향곡 제9번 ‘합창’ 4악장 등이 연주됐다. 단원들은 모두 관현악 전공자들이지만 군입대를 한 후 운전병·발칸포사수·소총수 등으로 근무하다 국군관현악단 창단에 맞춰 오디션을 거쳐 입단한 이들이다.

# 첫 공연이라 긴장한 탓인지 처음엔 손발이 다소 맞지 않아 어색했던 대목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연주는 안정되고 힘이 넘쳤다. 비록 보란 듯이 국제 콩쿠르에 입상해 병역특례를 받진 못했지만 병영 안에서라도 전투하듯 연주하겠다는 각오가 단원 한 명 한 명에게 깊이 스며 있는 듯했다. 특히 베토벤의 ‘운명’과 ‘합창’을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할 때는 여느 기성 오케스트라 못지않았다. 아니 연주에 담긴 열정만큼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지지 않았다. 어쩌면 저들 중에서도 새로운 클래식 스타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스쳤다. 조금 늦더라도 일종의 ‘패자부활전’을 뚫고서 말이다.

# 분명 그들도 세계무대를 꿈꾸며 손에 악기를 쥐고 몸부림쳤으리라. 하지만 현실은 군에 입대해 꽁꽁 얼어붙은 영내에서 악기 대신 소총을 들고 경계근무를 서야 했다. 얼어버려 감각마저 무뎌진 손을 녹이며 자신의 연주 인생은 끝났다고 스스로 절망한 시간도 있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들은 비록 병영에서나마 다시 손에 악기를 쥐고 있다. 그것은 단지 악기를 연주하는 것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 꿈을 되살리는 일이고 자기 안의 혼을 깨우는 일이요, 스스로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 그렇다. 인생은 단번에 결판나지 않는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 그래서 끝까지 해보는 거다. 실제로 각종 스포츠 분야에서 국군체육부대 상무(尙武)팀이 만만찮은 실력을 발휘했듯이 국군관현악단은 ‘오케스트라계의 상무’, 아니 그 이상이 될지 모른다.

# 지난 11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부산 소년의 집 관현악단의 연주가 펼쳐졌다. 고(故) 알로이시오 슈왈츠 몬시뇰 신부가 1979년 창단한 부산 소년의 집 관현악단은 아동복지시설인 ‘부산 소년의 집’ 부설 중·고교생과 그 졸업생들로 구성됐다. 형편상 단원들은 이렇다 할 정규레슨을 받아본 경험이 별반 없다. 그저 선후배끼리 연주기법을 서로 일깨우며 커왔다. 악기도 변변치 않다. 후원회원들이 사준 평범한 일반 악기를 순번대로 받아 든 게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 세계 최고의 무대인 카네기홀에 서 있다.

# 부산 소년의 집 관현악단의 연주를 처음 접한 후 2007년 8월 25일자 본란 칼럼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회’란 제목으로 나는 이렇게 썼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악기는 비록 명품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자기 인생을 명품으로 만들고 있었다. 명품 인생은 타고난 지위와 물려받은 재산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운명에 맞서며 자기 삶에 대한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진한 애정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부산 소년의 집 관현악단 아이들은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줬다. 그래서 그들이 펼친 연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회였다.”

# 자기 인생을 바닥에서 일으켜 명품으로 재탄생시킨 이들을 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단어만큼 놀라운 말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저앉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다, 나아갔다, 이겨냈다, 해냈다! 결국 국군관현악단과 부산 소년의 집 관현악단의 단원 한 명, 한 명이야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실천자요 승리자들이다. 설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담긴 불굴의 의지와 정신으로 다시 해보자.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그날까지!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