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 현장을 가다] 2. 디지털 중심은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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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디지털은 보수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아니메)업계도 비켜갈 수 없는 도도한 흐름이다.

일본 최초의 100% 디지털 아니메 '블러드 라스트 뱀파이어' (1999)를 제작한 프로덕션 IG의 이시카와 미츠히사 대표는 아예 "셀애니메이션은 더 이상 제작하지 않겠다" 고 선언했다.

하청 주는 일 없이 1백50여 명의 직원으로 자체 해결할만큼 완고한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보금자리인 스튜디오 지브리를 찾으면 이 시대의 흐름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채소밭이 인상적인, 지극히 한적한 도쿄 외곽의 고가네이시(小金井市)에 외딴 섬처럼 떠 있는 스튜디오 지브리 안에도 어김없이 컴퓨터 그래픽(CG)작업실이 갖춰져 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를 움직이며 작업하는 것은 다른 제작사 CG실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지브리 CG실의 분위기는 뭔가 특별하다.

미야자키가 직접 디자인했다는, 동화 속에 나올법한 건물 외양과 층층이 버티고 서 있는 토토로 인형과 토토로 방석 등 토토로 캐릭터들은 일단 컴퓨터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게다가 CG실 벽면에 그려놓은 파란 하늘이 보이는 넓은 창은 마치 컴퓨터의 차가움을 거부하는 듯한 묘한 느낌을 준다.

지브리는 '원령공주' (1997년)를 시작으로 컴퓨터와 인연을 맺었다. 5백80여 개나 되는 색을 지정하고 배경을 그려 넣는 일은 이제 모두 모니터 안에서 이뤄진다.

그렇지만 지루하고 귀찮은 수작업이 컴퓨터로 대체됐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지브리의 작품을 배급하는 토쿠마 인터내셔널의 스티븐 앨퍼트 대표는 "사람들이 디지털 애니메이션을 오해하고 있다" 며 "아무리 컴퓨터 기술이 발전한다해도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결국 개개 애니메이터의 기술" 이라고 말했다.

"관객들이 애니메이션을 볼 때 감탄하는 부분은 컴퓨터 기술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배경이 아니라 캐릭터의 친근함과 사실적인 움직임이기 때문에 애니메이터의 중요성은 오히려 더 커진다" 는 것이다.

실제로 '원령공주' 제작에는 원화를 무려 14만4천 장이나 그렸다. 컴퓨터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귀를 기울이면' (95년)의 원화 6만5천 장의 두 배가 넘는 분량이다.

타무라 아츠시를 비롯해 내년 6월 개봉하는 미야자키 하야오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인 '치히로의 실종' 에 매달렸던 지브리 애니메이터들도 "단 몇초 간의 장면을 위해 며칠동안 수십 장의 원화를 그리고, 또 그렸다" 고 털어놓았다. 컴퓨터 작업이 시작되는 건 그 다음이다.

'다마곳치' 로 우뚝 선 장난감회사 반다이의 자회사로 아니메 투자.기획을 하는 반다이 비주얼의 프로듀서 스기타 츠토무 역시 "디지털 기술력만 믿고 애니메이션 업계에 뛰어든 많은 게임업체들이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며 "탄탄한 기획력과 아이디어 없이는 어떤 성과도 기대하지 못할 것" 이라고 충고했다.

디지털에 관한 또 다른 오해는 디지털 기술이 제작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컴퓨터 기술은 때론 제작비 절감 효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디지털에 인간의 따스한 체온을 불어넣으려면 수작업보다 오히려 몇 배의 제작비가 들 수도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본부장이자 프로듀서인 스즈키 토시오는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게 사람이 그리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제작비도 비싸다" 며 "적게는 2억5천만엔(약25억원), 많게는 10억엔(약100억원) 안팎의 제작비가 들었던 이전 작품에 비해 '원령공주' 의 제작비가 무려 23억5천만엔(약2백35억원)이나 든 것도 컴퓨터 작업 탓이 컸다" 고 밝혔다.

엄청난 제작비의 비밀은 '원령공주' 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검은 연기에 있다. 주의깊게 본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이 검은 연기를 단 30초 뿜어올리는데 6천만엔(약6억원)이나 들었다고 한다.

기존 셀애니메이션 방식대로 흰연기를 쓰면 3백만엔(약3천만원)만 들이면 될 것을 좀더 현실감있는 묘사를 위해 20배의 제작비를 쏟아부은 것이다.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작업했던 한 스태프는 "검은 연기를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선생님이 너무 기뻐하셨다" 면서 "여기저기 검은 연기를 넣으라고 주문했지만 막대한 제작비 때문에 결국 당초 계획보다는 적게 넣었다" 고 말했다.

희든 검든 그저 배경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소품을 처리하는데 엄청난 돈을 들이는 것을 쉽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분명 표현할 방법이 있는데 단지 돈 때문에 그걸 포기한다는 것은 1차 관객인 작가의 자존심에 용납할 수 없었을 것" 이라는 앨퍼트 대표의 말에서는 강한 프로정신이 느껴졌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라 해도 아니메는 결국 사람의 예술일 수 밖에 없고, 그렇다보니 애니메이터들에게 더욱 철저한 장인정신이 요구된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라 하지만 캐릭터를 창조하고 탄탄한 콘티를 짜내는 기획력과 완벽을 추구하는 근성 있는 애니메이터 없이는 역작의 탄생은 불가능하다.

도쿄=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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