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사법적 판단과 민주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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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플로리다 주 일부 카운티의 개표를 둘러싼 민주당 앨 고어 후보와 공화당 조지 W 부시 후보의 공방으로 인해 선거가 끝난 지 보름이 넘었음에도 미국의 대통령 당선자를 가리지 못하는 미증유의 사태가 계속되고 있다.

전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플로리다주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수작업 재검표 결과를 최종 집계에 반영하는 것이 옳다고 결정을 내려 일단 고어 후보쪽의 손을 들어주었으나, 부시측에서 다시 연방대법원에 제소할 것이라는 소식이 있어 혼란을 더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를 보는 미국민들의 심정은 매우 착잡한 듯하다. 세계 제일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자부심에 심각한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의 언론들은 미국의 대선정국이 혼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카프카에스크(Kafkaesque)' 란 자조적인 신조어로 표현하면서 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더라도 선거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국론분열의 상태가 초래될 것을 염려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비록 매우 혼란스러운 것은 사실이나 한편으로 볼 때는 매우 경이롭게 느껴지는 측면도 있다.

미국의 대통령은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서방세계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는 엄청난 권력을 가진 자리다.

이런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될 것인가 하는 매우 민감한 정치적 문제가 아무런 물리적인 힘의 충돌 없이 법률가들의 사법적 판단에 전적으로 맡겨지는 것을 보면서 삼권분립을 근간으로 하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사회적 갈등이나 분쟁이 원색적인 힘의 행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정에서 사법적 판단에 의해 해결되는 정도가 바로 민주주의의 성숙도와 직결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시민의 권리의식이 고양됨에 따라 종전에 정치의 영역 또는 최고 권력자의 통치권 행사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던 많은 문제들이 점차 사법적 판단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는 고무적인 현상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지난 4월 총선에서 불과 수십 또는 수백표 차이로 당락이 갈렸던 일부 선거구의 경우 당선자가 최종적으로 사법적 판단에 의해 확정됐고, 당사자들은 사법부의 판단에 깨끗이 승복하는 좋은 모양새를 보여 주었다.

또한 지난 11월 초 서울행정법원은 지난해 사면복권된 일부 인사들의 사면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법무부장관을 상대로 낸 정보공개청구 관련 소송에서 원고 승소판결을 하면서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로 인해 사면된 사람들에 대한 사면실시 건의서 및 사면 심의를 위한 국무회의 안건자료를 공개토록 명했다.

종전 대통령의 통치권 행사로 생각되던 문제에 대해 국민의 알권리를 인정한 획기적인 판결로 보인다.

재판부는 대통령의 사면권은 "정치적으로 남용되거나 당리당략적 차원에서 행사할 수 없는 헌법 내재적 한계를 갖고 있는 만큼 국민들은 대통령의 사면행위가 이런 한계를 벗어났다고 생각될 경우 이를 비판하는 등 사면에 관한 자유로운 의사를 형성할 수 있다" 고 판단했다.

최근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법적인 절차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집단적인 힘의 과시에 의해 원하는 것을 얻어 내려는 경향이 점차 두드려져 가는 듯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정치.사회적인 분쟁이나 갈등이 거리에서의 힘의 충돌 없이 사법적인 판단의 영역에서 해결되도록 사회 각계가 노력해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신희택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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