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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탄생 100주년] 정준명 전 삼성 회장비서팀장 기고<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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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인간미

호암 탄생 100주년 1910. 2. 12 ~ 1987. 11. 19

동양 속담에 돈과 권력 가진 사람에겐 친구와 벌레가 낀다는 말이 있다. 호암은 벌레가 끼지 못하게도 하지만, 벌레를 잘 찾아냈다. 아니 벌레가 접근할 수 없는 치밀함과 철저함이 있었다. 작은 균이 온몸에 퍼지는 것을 경계했다. 사람을 압도하는 안광(眼光)으로 두렵기도 했고, 엄숙한 침묵 앞에 굳어버리기도 했지만, 남다른 인간적 향기를 느끼게 깔끔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에 충격을 받은 호암은 국장(國葬) 행렬이 태평로를 지나갈 때 28층 집무실에서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린 분이었다.

평소 사장들과 임원들을 접하면서, 간혹 비서실장이나 비서팀장에게 “오늘 어느 누구의 표정이 밝지 않은 것 같다, 한번 들어보라”고 할 때도 있었다. 슬그머니 들어보면 어김없이 무언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정, 자녀, 경제적 애로, 상하 간의 문제, 언로(言路)의 불만이 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필자보고도 “오늘은 피곤해 보인다, 어디 아픈가, 내게 할 말이 있나, 회사가 잘 안 돌아가나” 등등을 타진했다. 어려워서 할 말을 못하는 것도 직감으로 알았다. 당시 비서인 필자가 무언가 들킨 듯 섬뜩하기도 했는데 그만큼 비서의 상태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비서를 가볍게 대하는 일은 물론 없었으며, 평소 숙제로 집중 단련시켜 놓고는 직관으로 다루기도 했다.

댁의 생활비, 공사 간의 개인적 지출 명세를 매달 찾아 점검하고 지난달보다 지출이 많은 달은 반드시 언급을 해서 바로잡았다. 1981년 말 필자는 비서팀장이 되어 보스턴 대학에서 호암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할 때 약 한 달간 미국 출장을 수행했다. 미국 재계·언론·학계 및 대기업 회장들을 두루 만났는데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그때 주신 말씀이 평소 교육량의 일 년치는 되는 것 같았다.

호암이 특별히 아꼈던 고려 중기의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靑瓷辰沙蓮華文瓢形注子)’를 감상하고 있다. 그는 평생 수집한 미술품을 호암미술관에 기증했다. [삼성그룹 제공]

▶에피소드=“요즘 사장들이 나하고 약속한 매출, 손익, 신규 사업, 이런 것들을 지키지 못하고도 잘했다카더라. 사장되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어렵쟤? 고함을 치면 좋은 것, 잘한 것만 가져와 보고하니 날더러 우야라는 거고.”

“일을 잘해서 진급시켜줬더니 일을 잘 못하더라. 진급시키면 안 된다는 얘길 듣던 사람이 진급하고 나니 아주 잘하는 건 왜 그럴까. 나는 인사를 해보면 70%밖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봐야제, 아매(아마).”

“부실경영은 형법에도 없는 죄다. 부정과 사람 잘못 보고 잘못 쓰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삼성은 엄격한 사풍, 엄정한 인사와 감사 때문에 나를 냉혹하다고 한다고 듣고 있다. 내가 그리 냉혹하나? 정군(鄭君)은 모른데이. 내가 임직원들, 사장들을 얼마나 사랑하나를.”

한번은 외부에서 회장님의 카리스마 때문에 삼성의 사장들은 손금이 없다는 우스개가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이 말을 듣고는 “누고? 손금 없는 사장이?”라며 웃으면서 “그런 사람 내는 안 쓴다”고 하곤, “있다 해도 그런 사람 오래 못 가쟤”라고 했다.

◆철저한 교육

1972년 2월 호암이 62회 생일을 맞아 서울 장충동자택에서 셋째 아들인 이건희 전 삼성 회장, 막내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왼쪽 둘째), 맏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맨 오른쪽)과 함께했다. 호암의무릎에 손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이 앉아 있다.

기업문화라는 말이 생소하던 60~70년대에 호암은 자기성찰과 자기구현을 먼저 훈련하게 함으로써 성실하고 반듯한 유교적 자본주의의 일꾼, ‘삼성맨’을 가꿨다. 신입사원 교육과정부터 매년 실시하는 직급 및 직능별 집합교육과 승진자 보수(補修)교육 등의 재교육 제도를 확립하게 했다.

연수원을 짓고 교육을 집중으로 하기로 했지만, 교과과정(curriculum)과 시간 배정 및 교안을 어떻게 꾸리는 것이 효율적이고 성과가 나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외부로부터 좋은 강사도 초빙했지만, 자체적으로 준비할 일이 많았다. 매일 교육과정과 인원 수를 보고받았다. 또 주요 외국어 교육전담 ‘외국어생활관’을 구상해 필자는 일본 소니·NEC·산요(Sanyo)·마루베니·이토추·NTT 등 주요 기업의 외국어 교육 실태와 제도, 교육 현장을 탐방해 보고드리곤 했다. 잘 내주지 않는 일본 교재를 수집해 번역 응용했고 선진국 회사교육제도 등을 서둘러 도입했다.

교육과정부터 글로벌 마인드를 염두에 뒀으니 70년대에 뿌린 씨앗이 이제 세계 곳곳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본다. 82년 용인에 종합연수원을 개원할 때 호암의 교육관(敎育觀)이라 할 어록을 현관 벽 대리석에 새겨두었다. “기업은 사람이다”로 시작되는 이 글은 인간 중심, 인재 제일의 요람을 상징했다.

선배와의 대화 및 사내 강사제도로 현장 경험에 의한 스킬(skill)을 전수하고 내리 사랑으로 코칭을 중시했다. 그리고 기업을 둘러싼 이해 당사자를 만족시키는 공부도 시켰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기업 경영은 재무 판단도 중요하지만, 공정·공평·공명해야 한다고 하며 이를 엄격한 인사와 충실한 감사로 끊임없이 조절했다. 인재가 많은 회사는 외침(外侵)에 강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목표 관리 시스템으로 무장하도록 하였으니 회사가 잘 될 수밖에 없게 했다. 높은 목표 의식을 갖게 했다. 또한 본인께서 사전에 충분히 공부를 한 후 회의를 소집하곤 하였으며 선의의 경쟁을 시킴으로써 크로스 체크(cross check)가 쉽도록 하여 판단했다.

관성과 타성을 배제하는 기회로 인사고과는 좋은 제도였다. 인사고과 양식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아 일본의 종합상사와 주요 제조회사를 찾아 다녔다. 이를 참고로 삼성은 1년에 업적고과 두 번과 능력고과 한 번을 했는데 이 자료의 5년치를 보면 누구라도 누가 어떤 역량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어 공정한 인사가 정착할 수 있었다. 호암은 도덕성을 미리 알아서 사람을 뽑고, 배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이 없겠는가를 고민해 비서실의 당시 인사팀장과 도쿄 주재 중이던 필자에게 동시에 이 숙제 해결의 엄명을 내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채근을 받았는데, 도쿄의 대학·언론·병원·연구소 등을 찾아가 문의를 거듭하던 중 우치다(內田)라는 정신연구소를 소개받게 되어 독일에서 개발되고 일본에서 개량된 기발한 도덕성 테스트 기법과 분석 방법을 보고할 수 있었다. 이를 사원 채용 때부터 반영하라는 지시로 약 30년이나 그룹 내에서 광범위하게 활용하게 되었다.

사회에서는 그룹이니 재벌이니라고 부르며 부정적인 평가로 문어발이라고도 했지만, 호암은 관계 각 사가 각각 하나의 전문부서요, 팀으로 보고 시너지를 발휘하게 했다. 순수 기술, 미래 과제 기술을 전담할 종합기술원과 세계 정세와 경제 동향, 정책 입안의 아이디어를 다룰 경제연구소를 만든 것은 놀라운 혜안이 아닐 수 없다. 고급 두뇌를 방치하는 것은 참지 못했다. 호암은 평소에 정말 쉬지 않고 호기심을 키웠고 사람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매주 붓글씨를 썼는데, 자손과 주변 사람들에게 내릴 휘호를 고르기 위해 4자성어를 열거해 오라는 지시를 받고 30가지를 올렸다. 당시 이건희 부회장을 위해 ‘경청(傾聽)’을 썼다. 필자에게는 ‘신상필벌(信賞必罰)’과 몇 주 후엔 ‘사필귀정(事必歸正)’을 써주셨다. 휘호마저도 긴장과 엄격함을 피할 수 없었다.

◆조율과 조련의 기린아(麒麟兒)

▶에피소드=80∼81년 해외 현지법인 감사를 광범위하게 했는데, 그 보고서를 도쿄 주재 중인 필자에게 주며 소감을 말하라고 했다.

“정군도 주재원 하고 있고 여러 일본 회사 사정도 잘 아니 읽어보면 느낌이 있을 것이고 동료 주재원들이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일하는지 알 거 아이가.” “거기 써 있는 게 다 맞다면 큰일이다. 해외 주재원들이 대체 왜 필요하며, 외화 낭비하고 바깥에 나가 있을 필요 있나. 재고는 늘어나고, 제값도 못 받고, 사업은 부실하고, 제대로 일도 못 배우고, 본사는 허위보고를 해도 모르고…. 어찌해야 되것노? 정군이 한번 돌아보고 오래이. 감사한 곳을 슬그머니 가 보고 감사 후의 동향, 사기(士氣), 개선 가능성, 일본의 상사나 은행들은 그 지역에서 어떤 일을 하고 성과를 내는지 보고 오너라. 비행기도 호텔도 직접 예약하고 지점에는 알리거나 부탁하지 말고 갔다 온다! 밥 얻어먹지 말고 정군이 사주고 친구처럼 직접 얘기 듣고 와 내게 얘기해라. 돈은 좀 가지고 가거라.”

당시 필자는 일본 이외의 지역은 2년간의 월남과 반나절의 대만 이외엔 나가본 적이 없고 구미(歐美)라곤 가본 적이 없었던 한자(漢字)문화권의 간부였다. 출장비와 약간의 예비비를 들고 지시대로 3월 한 달을 주요 6개국의 해외 현지법인, 한국계 은행 지점, 일본계 은행 지점, 일본 종합상사의 현지법인, 현지 교수 및 주재원 다수를 ‘친구처럼’ 만나보는 기록적 출장을 다녀오게 되었다. 겁도 없이 처음 겪는 시차를 이기지 못해 몽롱하기도 한데 호텔방에선 그날의 보고서를 대충 써가며 귀국해서는 다시 일주일간 정리해 350여 페이지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당시는 모두 손으로 직접 써서 보고서를 만들었기 때문에 혼쭐이 난 셈이었다. 호암은 이 보고서를 줄을 쳐가며 보시다가 전화를 주셨다. “이런 보고서는 역작(力作)이라 해야겠쟤? 욕 봤다. 그럼 이후 대책은 어찌하면 좋으냐. 이걸 감사반이나 물산 사장에게 보내면 많아서 못 읽는다. 5분의 1로 줄여서 다시 보내봐라.” 이 일로 필자는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균형감각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각 지역 현장의 형편과 해외 비즈니스의 냉혹함과 인사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당시는 글로벌과는 거의 무관했던 시절이니 필자의 보고서 수준보다는 이러한 시도를 하게 했던 호암께 경복(敬服)하는 것이다.

◆새 삼성

20세기에 사업보국의 구국(救國) 결단으로 솔선수범한 호암은 실용과 현장, 효율과 효과를 기치로 하여 숨가쁜 시대를 이끌어 왔다. 그 창업정신은 곳곳에, 실로 많은 공적을 남겼다.

호암이 타계하신 지 22년,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일거오득’ ‘오고초려’ ‘이타(利他·Altruism)’를 중시한 경영을 통해 총매출 약 11배 이상, 순이익 약 86배 이상 증가라는 경이로운 성장을 이뤘다.

호암이 가장 잘한 것은 재산 상속보다도 경영 상속을 하며, 후계자를 잘 선정한 일이라고 단연코 말하고 싶다. 호암의 장점과 혜안이 후대에 의해 진화되고 심화돼 삼성이 세계가 사랑하는 좋은 회사가 되어 새로운 백 년을 향해 도약하고 있는 모습에 대해 하늘에 계신 호암도 매우 흡족해하실 것이다.

정준명(65) 전 삼성 회장비서팀장은 …

1970년대 중후반~80년대 초반 7년여 동안 지근거리에서 호암을 보좌했다. 호암의 갖가지 구두 지시를 받아 기록하고 이행했던 그는 삼성 출신 인사들 중에서도 호암을 잘 기억하는 인물로 꼽힌다.

▶74~81년 삼성전자 도쿄지점 ▶81~83년 삼성 회장비서실 비서팀장 ▶89~92년 삼성전자재팬 대표이사 ▶92~93년 삼성 회장비서실 비서팀장 ▶98~2004년 삼성재팬 대표이사 사장 ▶2004~2007년 삼성인력개발원 상담역 ▶2007~현재 법무회사 리인터내셔널 상임고문

[관계기사 보기] 정준명 전 삼성 회장비서팀장 기고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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