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책도 생필품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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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그렇다면 책이 냉장고(공산품)와 같다는 말인가요?"

인터넷서점의 급성장으로 야기된 도서정가제 논란을 취재하다가 '책도 할인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는 물음 끝에 출판계 관계자들로부터 거의 예외없이 들었던 반문이다.

그 심리적 배경에는 정신의 자양분을 공급하는 책의 유통을 '세속' 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느냐는 문화적 우월감이 엿보여 선뜻 대꾸하기 어려웠다. 그에 대한 대답을 세계 출판인들 사이에 회자되는 이야기로 대신해도 괜찮을 듯하다.

1935년의 일이다. 펭귄 시리즈를 처음 선보였던 앨런 레인이라는 출판인은 첫 10권의 판매실적이 신통찮자 영국의 거대 잡화점 체인이었던 울워스를 찾았다.

펭귄 시리즈를 그 체인에 납품하기 위해서였다. 역시나 구매 담당 책임자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마침 남편 사무실에 들렀던 구매 담당자 부인의 이 한마디가 없었다면 펭귄시리즈는 세계적 시리즈로 자리잡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책을 양말이나 차(茶)와 함께 생활용품으로 팔아서 안될 이유가 뭐람?" 펭귄시리즈의 성공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책을 영국인의 생활 깊숙이 집어 넣었던 것이다.

물론 도서정가제가 지켜지면서 독서문화가 향상되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그러나 도서정가제를 고집하기엔 우리 사회의 기술적.문화적 환경이 너무 변했다.

인터넷 상거래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물결이다. 도서정가제를 고수해야 한다는 한국출판인회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인 한 중견출판사의 사장도 "인문서적은 오히려 온라인에서 더 많이 팔리고 수금도 현금이어서 유익한 면이 많다" 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한국영화나 가요시장에서 보듯 문화산업의 중심축은 이미 창작에서 배급이나 기획으로 넘어간지 오래다.

도서의 가격경쟁을 우려하는 관계자들은 양서 출판의 위축을 심히 우려한다. 그러나 70년에 정가제가 폐지된 스웨덴에서는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양서출판을 내건 중소출판사들이 대거 출판시장에 뛰어드는 현상이 일어났다. 가격 할인경쟁이 치열한 대중서를 피해 학술.인문서를 선택한 결과다.

영국의 경우 95년 정가제 폐지 이후로 할인에 힘입어 고전작품도 판매량이 늘어났다. 영국의 시장 연구기관인 민텔은 최근 내년도 도서판매량이 97년에 비해 17%나 늘어날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오히려 이번 논란이 온.오프라인의 출판계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도서문화의 저변 확대를 위해 머리를 짜내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발렌타인 데이에 이어 화이트 데이다, 빼빼로 데이다 해서 뭔가 선물할 명분을 끊임없이 찾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책을 선물하게 할 아이디어는 없을까.

매년 4월 23일을 전세계가 책의 날로 정하고 축제 분위기를 유도하는 데도 독서의 중요성을 유독 강조하는 우리는 그냥 지나친다.

스페인에서는 이날 연인에게 책을 선물하는 것이 관습으로 자리잡았다. 도쿄 국제도서전이 매년 2월에 열던 것을 지난해부터 4월로 옮긴 것도 책 읽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것이다.

"인터넷이나 할인점에서 책을 판다고 난리인데 정말 이해가 안돼요. 서점을 쉽게 찾지 못하는 주부들에게도 책을 접할 기회는 줘야 되지 않아요?"

어느 할인점에서 만난 주부의 불평에서 보듯 책의 판매 공간을 넓히는 것은 출판시장의 파이 자체를 키우는 셈이다.

정명진.대중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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