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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산 <2> 한라산 漢拏山 1950m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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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2면

1 남벽분기점에서 방애오름 오르는 계단길. 한 무리의 산행객들이 고개를 넘고 있다.

제주 말로 ‘돗’은 돼지, ‘드르’는 들판, ‘코’는 내의 입구란다. 예전 돈내코는 야생 멧돼지가 물을 마시러 내려오는 계곡이었다. 돈내코에서 백록담(1950m) 가는 길은 이 물길과 진배없다. 산꼭대기에서 발원한 물은 산 중턱에서 땅 밑으로 기어들어 흐른다. 사람 다니는 길 또한 그 위로 났다. 1994년부터 이 길을 막은 이유다. 한라산의 야생 동물과 다양한 식생, 하천으로 흘러드는 물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후 15년이 흐른 지난해 12월 이 길은 다시 개방됐다. 그리고 지난 두 달 동안 1만2000여 명이 돈내코 탐방로를 통해 산에 올랐다. 이 길은 백록담을 오르지 않고 옆으로 빗겨간다. 돈내코로 들어가 백록담의 남쪽·남서쪽 화구벽을 조망하며 윗세오름까지 간 뒤 어리목·영실로 하산하는 코스다. 정상에 서지 못한 아쉬움은 장대한 남벽의 위용이 보상해 준다. 또한 백록담보다 시끌벅적하지 않다. 곤혹스러운 오르막길이 없어 가족 산행으로도 제격이다.

2 구상나무에 눈과 얼음이 붙어 생명을 불어넣었다. 눈 맞은 강아지 같다. 3 북풍을 받는 어리목 하산길은 특히 눈이 많다. 화이트 세상이다. 4 네이비블루 하늘 아래 허옇게 얼어붙은 남서벽, 눈에 묻힌 구상나무 군락이 한참 동안 발길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지난달 15일 폭설로 인해 며칠간 통제됐던 길이 다시 열렸다. 멧돼지가 내려오는 길에는 설원과 잡목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혹한을 견디기 위해 동계 장비로 몸뚱이를 꽁꽁 동여맨 산행객들의 뒷모습이 들짐승 무리처럼 보인다. 주차장에서 5분 거리 탐방안내소(해발 500m)에 이르자 한 직원이 “아이젠과 스패츠를 미리 착용하라”고 권한다. 이 지점에서 적설량은 기껏해야 10cm 미만이지만, 그래서 더 미끄럽다. 이곳에서 평궤대피소(해발 1450m)에 이르는 길은 난대림이다. 화이트 천지인 가운데 굴거리나무·동백나무·사스레피나무의 잎사귀만이 푸르다. 오직 두 가지 색깔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널찍한 잎사귀를 가진 이것들은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지를 축 늘어뜨렸다. 1시간쯤 오르니 살채기도에 이른다. 제주 말로 살채기는 사립문. 사립의 초입이라는 뜻이다. 예전 한라산 일원에서 소와 말을 방목했다는데, 목책이 있던 자리일 것이다.

해발 고도상으로 1000m나 올랐지만 여전히 울창한 난대림이다. 눈이 더 올랑말랑 습한 구름 아래 숲은 어둡기만 하다. 30분쯤 더 오르니 시커먼 남벽이 보인다. 도중에 있어야 할 평궤대피소는 눈에 파묻혀 있어 그냥 지나쳐 버린 모양이다. 남벽의 위용은 소문이 아니었다. 표고차 200m의 벽이 마치 카라코람(검은벽) 히말라야의 거벽처럼 우뚝 솟아 있다. 벽 곳곳에 눈 무더기가 테라스를 이뤄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하다. 백록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성판악·관음사 코스에서는 이런 풍광을 볼 수 없다. 정상을 탐하지 않은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다.

남벽 분기점에서 길은 윗세오름으로 향한다. 웃방애오름(1699m)·붉은오름(1740m)을 왼쪽 어깨에 올려두고 북서쪽으로 길을 잡는다. 이 길에서 보는 남서벽 화구의 모습 또한 백미다. 시커먼 벽 표면에 눈·얼음이 달라붙어 마치 흑마의 이마에 흰 눈썹이 돋아난 것만 같다. 윗세오름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야가 확 트인다. 너른 평원에 펼쳐진 눈 세상은 그야말로 이국적이다. 남벽 아래보다 훨씬 많은 구상나무들이 ‘스노몬스터’로 변신했다. 가지 많은 구상나무는 눈이 쌓이고 바람이 불어 저마다 신비의 조각상이다. 눈사람·강아지·북극곰·해태… 힐끗 보기만 해도 이름이 떠오르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곳에 있다면 누구나 만물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가가 될 것 같다.

글=김영주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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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漢拏山·1950m

● 남한 최고봉으로 독특한 화산 지형과 풍부하면서도 이국적인 식물상으로 유명하다. 맹수가 없으며 아열대·온대·한대식물이 번성하는 식물의 보고다.

● 한라라는 이름은 하늘의 은하수를 잡아당긴다고 해서 붙여졌다. ‘영주산’ ‘무두산’ ‘원산’이라고도 불린다.

● 화산 활동에 의해 생긴 수많은 원추형의 작은 화산들이 곳곳에서 ‘오름’들을 이루고 있는데 그 수가 360여 개다.

들머리

관음사 코스(8.7㎞, 5시간) 제주시에서 오른다. 대학산악부나 해외 원정을 준비하는 등반대원들의 훈련 장소로 애용되며 다른 코스에 비해 큰 볼거리는 없다.

※관음사 매표소-(1시간)-탐라계곡대피소-(2시간)-개미목-(40분)-용진각대피소-(1시간 20분)-정상/ 탐방안내소 064-756-9950.

성판악 코스(9.6㎞, 5시간 20분) 동쪽 5.16도로에서 시작된다. 진달래밭대피소를 만나기까지는 조망이 트이지 않는 숲이 이어지지만 길이 순탄해서 남녀노소 누구나 오를 수 있다.

※관리사무소-(2시간 30분)-사라대피소-사라오름-(50분)-진달래대피소-(2시간)-정상/탐방안내소 064-725-9950.

어리목 코스(6.8㎞, 3시간) 이 코스에서 조망하는 제주의 오름들은 한라산의 진경 중의 하나로 꼽힌다. 백록담엔 이르지 못한다.

※관리사무소-어리목 계곡-(1시간 20분)-사제비동산-(40분)-만수동산(만세동산)-(1시간)-윗세오름대피소/탐방안내소 064-713-9950~3.

영실 코스(3.7㎞, 2시간) 금강소나무 숲과 오백나한상, 털진달래 군락지 등 진경을 볼 수 있다. 역시 백록담엔 이르지 못한다.

※영실휴게소-(1시간)-병풍바위-(1시간)-윗세오름대피소/탐방안내소 064-747-9950.

돈내코 코스(7㎞, 4시간) 지난해 말 새로 열렸다. 남벽의 위용을 볼 수 있는 코스다. 백록담엔 이르지 못한다.

※돈내코-(2시간)-살채기도-(50분)-평궤대피소-(40분)-남벽분기점-(20분)-방애오름샘-(40분)-윗세오름/탐방안내소 064-710-6920~3.

제주관광 사이트 www.jejutour.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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